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의 스승, 책
브랜딩은 연애 같다. 소개팅부터 시작하여 결혼까지 골인하는 해피엔딩의 연애기.
우선 내가 먼저 들이댄다.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탐색하기 위해 질문한다. 어떤 색 좋아하세요? 어떤 음악 들으세요? 주말에는 뭐 하세요? 취미는 뭐예요? 이건 어때요? 저건 어때요?
이를테면 다 퍼주는 호구의 연애다. 서로 간의 이견을 조율할 일은 거의 없다. 클라이언트는 갑. 그가 좋아하는 대로 맞춤 디자인을 한다. 설득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브랜드의 오너가 좋아한다면 나도 좋다. ”우린 서로 맞지 않아. 그만 만나자." 성격 차이로 인한 결별이라는 핑계는 무책임하다. 우리 사이는 사랑보다 강력한 계약서로 묶여 있다.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없고 계약서를 사이에 두고 해피 엔딩을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의 연애.
브랜딩을 위해 내가 탐구하는 것은 그 브랜드가 아닌 클라이언트라는 한 사람이다. 브랜드의 주인이자 앞으로 이 브랜드를 이끌어갈 수장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탐구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뭉게뭉게 떠다니는 상상과 생각들을 조목조목 구체적인 실물로 만들어가는 과정. 브랜딩은 혼자 할 수 없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동반자가 되어 성실히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한다.
"저는 이런 느낌이 좋아요. 저런 건 잘 모르겠네요."라는 클라이언트의 두루뭉술한 반응 뒤에 쌓인 사연을 구체화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물음표 살인마이다. 제 앞에 앉은 당신, "왜?"라는 질문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냥 끌려서요." 이유 없는 끌림 같아 보여도 다 이유가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와 톤 앤 매너가 비슷하든지, 최근에 꽂힌 디자인 레퍼런스와 닮았던지,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감상들이 끌림을 결정한다. 그저 내 역할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클라이언트의 이유를 찾아 주고 삶의 서사를 풀어내는 일.
"이러이러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 그러네요!"
디자이너는 때론 분석가가 된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사이다 분석가가 되어야 한다.
미팅 시 클라이언트와 나누는 대화의 사소한 몇 마디는 물론 눈빛, 표정,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어디서 브랜드의 중심이 될 좋은 단서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의 사소한 버릇 뒤에 담긴 내면적 동기를 파악한다. 실제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는 시간은 마지막 필요한 순간뿐이다. 브랜드의 이야기를 탄탄히 세워 가는 초기 과정이 가장 오래 걸린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오래 앉아 있다고 열심히 일했다는 기분이 든다면 오해일 수도.
브랜딩은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란 결국 그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브랜딩을 하려면 한 사람의 인생 자체가 통으로 들어온다. 어떤 디자인을, 왜 할 것인가는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느끼고 공감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람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더라.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파악하여 브랜드로 만드는 일은 소설과 너무나도 닮았다.
나는 소설을 한 사람의 삶에 들어가 그의 마음과 감정을 살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알고 확인하는 것을 넘어 알게 된 것에 책임감을 갖고 그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를 믿고 변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소설에 매료되고 지금도 소설을 사랑하는 핵심적인 매력이 그것이다. 뉴스는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을 중계해 줄 뿐, 그 사람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건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전후 사정과 내면과 이면에 대해 묘사하고 진술하는 일. 인물이 보인다고 하는 것을 작가도 보인다고 해 주는 일.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게 만들어 주고 그것이 허상이고 환상이라 할지라고 그의 눈에는 보인다는 것을 믿어 주는 일. 숨겨진 사연과 감춘 사건을 모두 뒤져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문장으로 써내는 일.
소설 만세 - 정용준
<소설 만세>에서 브랜딩과 소설의 닮은 점 대한 내 단상을 대변하는 글을 만났다. 책에서 나의 어렴풋한 생각들을 명료하게 풀어준 문장을 만나는 건 매번 짜릿하다. 독서는 나라는 사람의 깊이를 깊게, 부피를 크게 만든다. 그러니 책을 안 읽을 수 없다.
프리랜서로 혼자 일하는 내게 최고의 스승은 책이다. 회사를 나오니 고민들을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고, 대화를 나눌 환경이 사라졌다. 허허벌판에 혼자 남아버렸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책장에 꽂아두고 몇 년째 거들떠보지 않은 책이 들어왔다.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도 있다니. 책 속의 세계는 새로웠고 내 삶보다 넓었다. 독서는 내가 움직일 수 이는 주요 연료가 되었다.
매일 같이 디자인 아웃풋을 쏟아내느라 소진되는 나를 독서가 채워준다. 브랜딩, 디자인뿐만 아니라 철학, 심리학, 자기 계발서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는다. 브랜딩 관련 책 추천을 요청한다면 조로로록 목록을 만들어 줄 수 있지만 알려주지 않겠다. 대신 "소설을 많이 읽으세요. 브랜딩은 소설과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A가 겪고 있는 감정을 반올림 혹은 버림으로 정한 대략적인 값이다. '슬픔'이 7이고 '쓸쓸함'이 6이라면 A가 겪고 있는 감정의 정확한 값은 6.687이다. 그 숫자에는 단어를 부여할 수 없다.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나는 A가 왜 6.687의 감정을 겪고 있는지 알고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후 사정도 알아야 하고 A라는 인물의 연대기도 알고 있어야 한다. A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A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쓰기 편할 텐데 대부분 소설을 쓸 때는, 소설을 쓰고 싶을 때는, 쓰고 싶은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다. 그래서 막막하고, 그래서 대책이 없다. 확실히 아는 것은 내가 A를 아로 싶다는 마음 뿐. 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주고 여기저기 함께 가 본다. 뻔한 질문도 하고 곤란한 질문도 한다.
소설 만세 - 정용준
고급스럽지만 너무 올드하진 않게. 편안하지만 마냥 스트릿 하진 않게. 여성스럽지만 중성적이게. 디자인에 사용되는 표현들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하나같이 애매하다. 오로지 감으로만 파악할 뿐이다. 그 애매한 감을 갈고닦아 날을 세우는 건 디자이너의 몫이다. 브랜드가 떨어질 지점을 콕 집어내야 한다. 여기요, 여기가 낙하지점입니다! 위도 몇 도, 경도 몇 도, 몇 시, 몇 분에 착륙하세요! 사소한 차이를 파악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브랜딩은 소설과 정말 닮았다. 슬픔과 쓸쓸함 사이의 6.687이라는 감정을 글로 쓰는 소설처럼 말이다.
한 브랜드와 서로의 속도와 호흡을 챙기며 살뜰히 작업했다. 빨라야 할 때는 빠르게, 느려져야 할 때는 느리게, 함께 고민했다. 독특한 서체를 좋아하는 대표님과 취향이 통했고, 다움웍스의 강점인 BI와 타이포그래피를 기반으로 디자인을 풀면 되었기에 자신 있었다. 좋은 클라이언트는 자신의 브랜드에 어울리는 디자이너를 고른다. 자신의 취향을 확실하게 알면 브랜딩 방향성에 적합한 디자이너를 선택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자기와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때에 나타나는 사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참 특별한 인연이다. 담당자님이 내가 사회 초년생 시절 다닌 회사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우연히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의 행보를 봐왔고 언젠가 나와 일을 했으면 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오셨다고. 내가 다움웍스로 독립을 하고 해당 브랜드가 리브랜딩 작업을 하면서 만남이 성사되었다. 사람의 인연이 참 신기하다. 언제 어떻게 맺어질지 모른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있었고 모르는 곳에서 나를 조용히 지켜봐왔다는 것. 그리고 어느 날 만났다는 것. 감사할 수밖에. 수많은 디자이너와 디자인 스튜디오가 있지만 다움웍스에 연락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회 초년생 때부터 지금까지 나름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와서 다행이네요… 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훌륭한 결과물은 전적으로 클라이언트의 몫이다.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 정말 좋은 결과물을 냈다. 중요한 선택에서 늘 특별한 결정을 하셔서 독특하고 감각적인 브랜딩으로 탄생했다. 디자인 업계의 실력이 이제는 어느 정도 평준화가 되었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도 디자인을 하는 시대다. 디자이너가 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정서적, 감각적 교감을 나누고, 과감한 선택을 하며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클라이언트가 있어야 끗발 나는 브랜딩이 만들어진다.
디자이너는 결국 한 사람이 생애를 공감하는 사람이다. AI가 웬만한 디자이너만큼 디자인하는 시대에 얼굴을 맞대고 머리를 굴리는 디자이너와 클리언트는 사람이다. 우리는 공감할 수 있고 표정을 나눌 수 있다. 내가 되고 싶은건 실력 좋은 디자이너라기보단 좋은 사람이다.
과거에는 내가 잘 되려면 나만 잘나면 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었다. 내 주변이 잘 돼야 나도 잘 되는 거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브랜드가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다. 브랜딩을 의뢰하고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