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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pr 14. 2023

모든 이야기는 옆 가게 지물포사장님으로 시작된다.

마음의 블라인드 올리기


새로운 해, 1월이다. 연말에 입주 후 제법 작업실의 구색이 갖춰졌다. 가장 먼저 구매한 가구는 길이 180cm의 원목 테이블이다. 내 테이블의 길이가 180cm라니. 이거 실화야? 내 생애 가장 넓은 테이블이 생겼다. 노트북과 듀얼 모니터, 넓은 회의 테이블과 의자 6개. 한쪽 벽면에는 2단짜리 책장 두 개를 길게 배치했고 책장에는 디자인 서적을 채웠다. 드림노트에 붙인 꿈이 이루어졌다. 때마침 새해니 뭐든 될 거 같은 기대와 설렘이 잔뜩 일었다. 올해 나는 대박 난다. 내가 다 휩쓸어 버린다. (뭘 자꾸 쓸어버린다는 건지.)

이왕 1층에 작업실을 두게 되었으니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현관문에 알리긴 해야겠다. 지나가던 누군가 ‘다움웍스? 궁금한 이름이야’ 하고 검색하고 내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어 의뢰가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의뢰한 사람이 미래에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될 인물일 수 있으니 일단 뭐라도 해야 한다. 블라인드를 꾹 내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세상아 나를 봐달라!로 내적으로 외쳤다. 제 2의 스티브 잡스가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나였으면 좋겠다. 스티브 잡스도 처음엔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도 안될 건 또 없잖아? 나의 가능성은 나도 모르기에. 꿈은 이루어진다. 드림스 컴 트루.


유리 현관문에 흰 마카로 다움웍스가 하는 일인 Branding, Logo, Typeface와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주소를 적었다. 분명 나를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했지만 누군가 관심 있게 봐주었으면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라도 진심이다. 이상하게 들려도 진심이 맞다. 유리 문에 한 글자씩 휘갈겨 적는 중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람과 질문이 등장했다. 

옆 건물 1층의 고구려 지물포 사장님이 현관에 서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다가 작업실 문에 글을 쓰는 나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거기는 뭐 하는 데에요?“


이야, 망했다. 누가 말을 걸었다. 블라인드를 꾹 내려 안이 보이지 않는 가게, 모습을 통 드러내지 않던 수상한 주인, 웬 젊은 여자가 어슬렁거리며 현관문에 글씨를 적고 있으니 이 때다 싶었을 테다. 


우리 아빠와 동년배쯤 되어 보이는 사장님은 배가 나오다 못해 바늘로 콕 찌르면 터질 것 같은 배불뚝이였다. 주머니가 여럿 달린 작업용 조끼와 풀과 페인트 자국, 먼지가 스민 펑퍼짐한 바지, 정수리에 삐딱하게 얹힌 모자 사이로 희끗희끗 헝클어진 회색 머리카락이 튀어나왔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두터운 인생의 깊이만큼이나 두툼했다. 한 손에는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든 사장님은, 그렇다. 아재다! 


예상치 못한 사람과 질문에 순간 긴장해 쭈뼛쭈뼛한 대답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요."

“와아, 그러면 컴퓨터 잘하겠네!” 

사장님이 환히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면 컴퓨터를 당연히 잘 다룰 거라는 오해한다. 디자인 프로그램에만 익숙할 뿐이지 그 외의 컴퓨터 실력은 지극히 일반적이다.


“하하 잘하진 않고 그냥저냥 해요;; 하하;;”

건물과 건물 사이의 대략 2.5m의 거리를 두고 사장님과 대화가 이어졌다. 


"잘 됐네~ 컴퓨터는 도통 모르겠어~ 앞에 미용실에서 도와줬는데 알려줘도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다음에 모르는 거 생기면 좀 도와줘요.“


길 건너 맞은편 미용실에 부탁을 자주 하셨나 보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남매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이 동네 사장님들 연배 중 가장 젊었다. 이런 동네에 이제 갓 서른인 젊은이, 내가 등장한 것이다. 진심 망했다. 


“아핳ㅎㅎ 급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하핫”

지금 이 순간 전화벨이 울려 바쁜 척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험 광고 전화라도, 보이스피싱 전화라도 왔으면 좋겠다. 겨울임에도 관자놀이와 등골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매출은 잘 나와? 월세 내고 생활비 쓰려면 월 300만 원만 벌면 되지”

"하핫 열심히 해봐야죠 허허”


먹고사는 걱정도 곁들인 아재 휴먼 대화체. 이 대화는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주고받는 대화라기보단 기자회견에 가까웠다. 사장님은 질문을 하고 나는 대답을 했다. 특히 자영업자 선배로서 강조하신 내용은 세금이었다. 국세청 홈택스 들어가면 공부할 수 있다고, 잘 공부해서 나중에 자기도 좀 알려달라고. 사장님..? 저는 사장님 컴퓨터도 알려드리고, 세금도 알려드리려고 사무실에 월세 냅니까..?


사장님의 얼굴에는 세상 살이 고단한 그늘이 서려있지만 순박하고 솔직한 눈빛을 가졌다. 반존대를 섞어 쓰는 사장님의 말투는 상냥하고 차분해 어른 앞에서 긴장하고 뚝딱대는 나도 대화(라고 쓰고 질의응답이라 말한다)가 어렵지 않았다. 윗사람이라는 허세 없는 수평적인 눈 맞춤이었다.


여차여차 1인 기자회견을 마무리하고 겨우 작업실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현관문 도어락을 잠그고 이미 굳게 내려진 블라인드를 바닥을 뚫을 기세로 꼼꼼하게 내렸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해 월세의 노예를 자청하여 작업실을 꾸린 건데 이렇게 말 거는 사람이 생기면 곤란하다. 혼자 있고 싶다. 혼자 있는데도 혼자 있고 싶다고!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은 늘 당신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인생의 묘미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데 있다. 


사장님이 도와달라던 컴퓨터는 예상치 못한 사이트였다. 


슬슬 봄기운이 피어나는 겨울 끝자락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오후, 사장님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이게 뭔 일이고! 중대한 일이 일어났나 보다. 사장님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긴장해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바둑을 두는데 말이야, 승패 번복을 해야 되는데, 그거 좀 해줄 수 있나? 그동안 미용실에서 도와줬는데 지금 바빠서 안된다고 하네.”


도대체 그동안 미용실에 얼마나 부탁을 하신 겁니까. 이제 제 차례입니까?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바둑? 승패 번복? 난 바둑을 한 번도 둬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바둑이란 알파고를 이긴 이세돌 9단이고, 바둑알로 해본 건 알까기뿐이다. 사장님… 혹시 도박하시나????! 그럼 대박…. 무서워…. 사장님 오락을 즐기시는 분인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도배로 번 돈을 바둑으로 탕진하는 드라마에서 본 철부지 남편인 건가… 


사장님이 워낙 다급해 보여서 일단 지물포 가게로 황급히 따라갔다. 작업실에서 지물포까지 5m 남짓을 이동하며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가게에서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떡하지. 가게 문이 잠기면 어떡하지. 어떻게 SOS를 외치고 도망가지. 아 핸드폰, 핸드폰은 챙겨왔네. 길 건너 맞은편 미용실이 열려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선 저기로 제일 먼저 도망가자. 위기에 처하니 두뇌회전이 빨라졌다. 뭐든 간절하게 목숨을 걸면 뇌가 알아서 굴러간다. 만약의 일들을 단숨에 상상하고 도망갈 궁리를 했다. 나는 사서 걱정하는 ‘만약에’중독자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라도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안전한 법이다. 막상 걱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은 거의 없지만. 


7평 남짓한 고구려 지물포의 출입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유리창은 먼지들이 잔뜩 묻어 뿌얬다. 벽을 두른 도배지 진열장에는 비닐에 돌돌 말린 빛바랜 도배지와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여 있었다. 진열의 기능을 상실한 진열장은 오래된 건물의 얇은 외벽을 막아주는 단열재 역할인 듯했다. 가게의 3분의 1을 도배지 재단에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큼직한 기계가 자리했다. 그 주변으로 재단 후 남은 도배지 조각들이 뭉치로 놓여있었다. 애매하게 남는 크기의 벽에 붙이려고 버리지 않고 둔 듯했다. 좁은  방에 꾸역꾸역 모아 두었던 클리어 파일 5개처럼  쓸모가 있을 때를 기다리는  같았다흐트러져 보여도 각자의 위치가 있고, 대충 널브러진 듯해도 질서가 잡힌 사장님의 삶의 터전에 얼떨결에 들어왔다. 이 공간은 한 도배장이의 40년 인생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푸른 빛이 감도는 하얀 형광등이 여럿 켜져 있는데도 실내는 우중충했다. 가게 구석의 책상 위에는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 빈 청하 병과 담배꽁초가 찔린 종이컵이 널브러져 있고(내 눈에는 널브러져 있으나 사장님에겐 정리 정돈된 거다.) 그 옆에 오래된 컴퓨터가 호젓하게 놓여있었다. 해상도가 낮아 화면이 점묘화처럼 보이는 아담한 모니터에는 인터넷 게임 사이트인 한게임의 바둑이 펼쳐져 있었다. 한게임 바둑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다. 이 풍경 어디서 많이 봤는데. 영화에서 봤나… 타짜…이 사장님…. 도박하시나?????


내 생에 첫 도박쟁이를 실물로 목격한 순간일 수도 있다는 의심에 심장이 조마조마 해졌다. 다행히도 사장님의 또렷한 눈빛과 여유롭고 너털너털한 표정, 나긋나긋한 말투로 보아 나쁜 짓을 하는 분은 아닌 것 같았다. 사장님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사람의 분위기와 행동에서 품위를 느낄 수 있다. 슬쩍만 봐도 느낌이 쎄한 사람이 있다. 사장님은 분명 이상한 사람은 아닌 듯해 보이나 지금 이 상황은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고, 지물포 가게에 내 발로 직접 걸어 들어왔다. 현재 장면이 수상하면서도 흥미롭다. 이거 꽤 재밌는데? 자, 다음 전개는 뭘까.


컴퓨터 앞에 앉아 사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승패 번복 신청을 해야 하신 단다. 그 말인즉슨, 바둑을 두다 종종 오류로 이겼음에도 졌다고 결과가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과연 정말 이긴 건지 의심이 들긴 하지만 여하튼 사장님이 그렇다면 그런줄 알자.) 사이트 내 1 대 1 문의에 들어가 여러 카테고리 중 승패 번복을 선택하고 내용 란에 '신청합니다'라고 적으면 끝이었다. 10초면 끝나는 초간단 신청을 사장님은 어려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버튼이 어찌나 작은지 젊은 내 눈에도 잘 보이지 않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눈이 침침하고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은 충분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들이나 아내가 있으면 도와주는데 혼자는 도통 못하겠더라고”


사장님 눈빛이 바둑에 진심으로 반짝였다. 얼마나 긴박하셨으면 나에게까지 달려와 도와달라고 했을까. 사장님의 결연한 눈빛에 그 심정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또한 한판의 승리가 간절한 사장님의 바둑 실력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실력자는 절대 아님. 그런데요, 제가 사장님 바둑 승패 번복 신청하려고 작업실에 월세 내고 있습니까?


승패 번복 신청으로 사장님의 소중한 1승을 지키고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 사장님과 대화가 이어졌다.


“어디 살아?”

“OO동이요.”

“그 동네면 여기 오는데 좀 멀지 않아?”

“걸어서 35분 정도 걸려요. 운동할 겸 걷기 딱 좋죠.”

“운동 좋지. 그 동네가 옛날에는 하천이었어.”

“네? 제가 사는 데가 하천이었다고요?”

“거기에 시멘트를 깔아서 길을 만든 거야.”


사장님은 강동구 토박이인 내가 쨈도 안되는 선배 토박이였다. 작업실이 있는 이 길이 옛날에는 전국 각지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낙후된 현재 거리와 대조되는 젊은 시절의 찬란한 과거를 알려줬다. 내 작업실의 건물주가 좋은 사람이라며, 옛날에 같이 등산도 갔다며 젊은 시절 사장님들의 친목도 알려줬다. 난 물어본 적이 없으나 많은 걸 알려줬다. 역시 아재 휴먼 대화체.


“이제 일 좀 쉬고 싶어. 40년을 일하니 지겨워.”


일이 지겹다고 말하는 사장님의 표정이 정말 지겨워 보였고, 그 얼굴 위로 얼마 전 은퇴한 우리 아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빠도 평생 일하며 때로는 지겨웠겠지. 그럼에도 당신의 사명에 그래도 즐거웠을까. 아빠들은 무엇 때문에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걸까. 당신을 쉬지 못하게 한 이유에 나도 한몫했다. 자식들 키우며 보낸 아빠의 청년은 푸르렀을까. 사장님과 시시콜콜 떠드는 수다에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한게임 바둑은 사장님의 유일한 취미였다. 고구려 지물포는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매일같이 불이 켜져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장님은 매일 똑같이 출근했다. 성실한 한 집안의 가장이 자신의 일터를 지키며 즐기는 바둑은 건전했다. 


“얼마 전에 우리 딸이 결혼했어. 이제 곧 손주 태어나”


자식들을 자랑하는 사장님의 두꺼비 같은 턱살이 순간 부드러워 보였다. 눈부신 초봄 햇살에 반쯤 감은 두툼한 눈꺼풀은 동공을 보호하는 안전한 그늘 같았다. 세 걸음 떨어져 나누는 소소한 담소. 이런 대화가 얼마 만이었더라. 일방적으로 듣고 싱긋싱긋 리액션하는 방청객 역할이지만 오랜만에 재밌네.


이웃 1이었던 아저씨가 옆집 지물포 사장님으로 역할에 이름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비중 있는 조연이 되었다.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국면을 만든다. 그 국면은 아무리 예상해 본들 모든 상상을 뛰어넘어 펼쳐진다. 인생은 클리셰가 뻔한 드라마가 아니기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러니 벌어지는 일에 저항하기보단 순응하는 것이 현명하다. 


“근데 말이야. 어후. 블라인드를 좀 올려~ 음침해 보이자너. 환하게 있어. 뭐 하는 데인지 밖에서 보여야 홍보도 되지.”


블라인드를 굳게 내려 컴컴한 내 작업실을 보고 사장님은 진심으로 답답해하며 말했다. 사장님의 찌푸린 진실의 미간을 보고 푸핫 웃음이 났다. 그래, 음침해 보이지. 블라인드를 올리면 될걸. 이게 뭐라고. 마음의 문을 꾹 닫은 두려움은 음침하다. 블라인드는 언젠가 올려지게 될 걸 예감하고 있었다. 그때가 오기까지 기다리고 이을 뿐이었다.


작업실로 돌아와 블라인드를 올렸다. 유리 창 안으로 반짝이는 햇살이 들어왔다. 태양은 언제나 따뜻하고 화창하게 나를 비추고 있었구나. 이 햇살을 들이지 않은 건 나 자신이구나. 나도 참, 이게 뭐라고. 블라인드의 높이는 내 마음의 열고 닫힌 상태와 같았다. 굳게 내린 블라인드를 여는 한 사람, 뜬금없이 바둑을 도와달라는 지물포 사장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화는 편견을 깨고 마음을 열게 한다. 열린 마음이 이뤄갈 전개가 궁금한 새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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