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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랜드 Jul 11. 2024

방전

2023.10.07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사람의 에너지도 채워지지 않고 쓰기만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전조를 알아차린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까지도 그것이 마지막인 줄 인지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지내다가 어느 순간 그냥 바닥으로 꺼져버리기도 한다.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 걸까? 2달 동안 쉬는 날 없이 달려왔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바지런을 떨면서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생각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고 그들의 요구를 맞춰주어야 했다. 특별한 메뉴를 개발하거나 가게에 큰 변화를 준 것도 없지만 뭔가 매일이 쉽지만도 않았던 것 같다. 가게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상을 보내면서 그것이 가장 큰 감정노동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혼자 칩거하듯이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기를 수년,,,,, 이렇게 나와서 매일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음료를 준비해 주고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일들이 처음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잘 적응해가고 있고 너무 힘들거나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태그커피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나의 이런 생활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려는 듯 나는 어려운 일들을 쉽게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토요일 느지막이 브니엘 선생님이 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가게 뒤편에 주차를 하고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3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나는 개인 일정으로 일찍 마감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꼭 이런 날은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30-40분 후에 마감을 해야 된다고 말한 뒤 그래도 괜찮으시겠냐고 물어본 후 메뉴 주문을 받았다. 그는 와이프가 공덕초에서 운동하고 있다며 자신의 음료만 주문했다. 항상 앉는 자리에 앉은 그의 첫마디는 '추석 때 좀 쉬었냐"였다. 추석 연휴 내내 쉬는 날 없이 오픈했으며 오후에 손님 없으면 일찍 문 닫고 가는 날도 있었다고 말했다. 추석 당일만 손님이 좀 있었고 나머지 연휴에는 손님도 많이 없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연휴에도 카페 앞도로를 지나다니며 카페를 관찰하고 있었을 거라 예상했다. 장사가 되는지 손님이 있었는지 그 자신이 얼추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연휴 때 카페 앞 국숫집에서 식사 후 가맹점 커피를 양손에 들고 가는 그와 그의 가족들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그냥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자유이기도 했고 태그커피는 긴 시간 앉아서 쉬었다가는 공간을 강조하던 그의 말속에 어쩌면 그의 의중이 다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모녀로 보이는 손님이 오셨고 마감이 얼마 안 남았다고 공지 후 주문을 받았다. 조금 있으니 남편이 도착했고 마감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브니엘 선생님은 정확히 30분이 지나자 종이컵에 자신의 남은 음료를 담아서 인사를 한 후 공덕초로 향했다. 나머지 손님들도 이미 마감을 공지해 둔 상태라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니엘 선생님은 다음날 아침 10시쯤 와이프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10개를 꼼꼼히 찍은 쿠폰을 내밀면서 아메리카노 2잔을 주문하고는 둘이서 마시고 가자 들고 가자며 약간의 실랑이를 한 후 마시고 천천히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와이프는 자신들은 여행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12시쯤 일행들을 만날 것이고 자신들은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갈 것이라고 했다. 나는 여행 다니시는 걸 보면 제일 부럽다고 가게 시작 후 여행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둘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고 나는 하루키책과 마시려고 준비해 둔 꿀차를 챙겨 옆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 있는 오전시간을 가장 좋아하고 아직은 그 시간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문득 그는 오전의 나의 시간을 방해하고자 온 걸까? 아니면 어떻게 오전 시간을 보내는지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나는 30-40분쯤 하루키의 문장 하나하나 꼬집에 가면서 읽어 내려갔다. 그과 그의 와이프는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갔다. 나에게 말을 걸로 싶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랬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그와 더 깊은 대화를 원치 않았기에 책에 더 집중하력 애썼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나는 책을 그대로 펼쳐두고 주문을 받고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와이프는 아직 반쯤 남은 커피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주섬주섬 챙겼다. 나는 남은 커피를 테이크아웃컵에 담아드리겠다고 했다. 그들은 은근히 좋아하면서 뜨거운 물오 다시 따뜻하게 채워진 아메리카노 2잔을 챙겨서 떠났다. 아마 그들은 이제 태그커피를 자주 방문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편한 대화상대가 아니고 본인이 주도하는 대화가 잘 성립되지 않는 인물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내가 내속의 에너지를 지켜내는 방법은 이런 식으로 서로 어긋나는 관계들을 적절히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맞지 않는 관계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고 그 에너지를 모아서 서비스 마인드 장착하고 다른 분들을 더 챙겨드리는 것이 더 기분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분들은 내가 챙겨드리면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만큼 되돌려주시려 하시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에게 더 정성을 쏟는 게 내가 방전되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오래오래 태그커피를 운영하고 싶은데 아직은 갈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하늘도 이쁘고 공기도 좋은 두구동에서 나도 살며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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