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럴》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 책은 동성애자였던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저자가 돈을 벌기 위해 맨해튼의 대형 백화점에서 인형 판매 사원으로 일하던 중 딸의 선물을 사러 온 모피 코트를 걸친 금발 여성에게 매혹되어 소설을 창작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이 장면이 상당히 강렬했는데 실제 겪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소설을 썼다니 새삼 대단하다. 저자가 쓴 책 중 스무 편 이상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그중 한 명이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영화로 만든 알프레도 히치콕이라고 한다.
영화는 오래된 카메라 필터를 끼얹은 것처럼 아련하다. Carter Burwell의 오프닝 곡은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영화에는 그의 노래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주인공 캐롤(케이트 블란챗)과 테레즈(루니 마라)의 첫 만남은 소설 저자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딸을 두고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남자 친구가 있지만, 결혼에 확신이 없는 테레즈. 딸아이의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방문한 캐롤은 인형가게 점원 테레즈와 눈이 마주친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캐롤의 눈빛이 이상하게 싫지 않은 테레즈. 일 하면서도 눈은 계속 캐롤을 쫓아간다. 그러다 시야에서 사라진 캐롤. 사라진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테레즈는 내심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잠시 후 캐롤은 테레즈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풍성한 털 코트를 입고 다홍색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쓴 캐롤. 마주 선 테레즈에게 보내는 매혹적이고 어딘지 퇴폐적인 그녀의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기 충분했다. 캐롤 역은 맡은 케이트 블란챗이 완벽하게 캐롤이라는 배역에 흡수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 첫 장면부터 시작된다. 기다란 가죽장갑을 진열대 위에 툭 하고 얹어놓으며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딸아이의 선물을 추천해 달라고 말한다. 그녀의 이런 낮고 묵직한 목소리는 아마 테레즈보다 좀 더 중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첫 만남에서 아이에게 줄 선물로 기차 세트를 추천해 주고, 캐롤은 집 주소를 적어주고 백화점을 떠난다. 캐롤이 떠나고 진열대 위에 남아있는 가죽장갑. 테레즈는 장갑을 돌려주기 위해 캐롤에게 연락하고 함께 점심을 먹게 된다. 테레즈를 보고 첫눈에 이끌린 캐롤은 일부러 장갑을 두고 갔을 것이다. 그녀와 다시 만나기 위해.
캐롤은 테레즈를 집으로 초대하고 두 사람은 이끌리듯 서로를 알아간다. 함께 집으로 가는 차 안. 'To Carol's'가 흘러나오며 캐롤을 바라보는 테레즈의 시선. 캐롤에게 빠진 듯 혼미한 그녀의 정신이 터널 속 어둠 같다. 캐롤의 집에 가는 길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기 위해 잠시 차에서 내리고 테레즈는 나무를 고르는 캐롤의 옆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사실 그녀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인물사진을 찍는 아마추어이다. 캐롤을 사진에 담는 그녀의 눈빛에선 애정이 묻어난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Christmas Tree’. 음울하지만 그녀의 감성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음악과 장면이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이혼소송에 지친 캐롤과 남자 친구의 청혼에 고민하는 테레즈. 둘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한다. 시종일관 감정을 파고드는 음울한 OST만 나오던 영화에서 유일하게 밝은, 진짜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나오는 시점은 둘이 함께하는 여행길에서이다. 따로 방을 잡자는 캐롤에게 스위트룸을 잡자고 권유하는 테레즈. 여기서 테레즈는 이미 캐롤에게 자신의 마음을 허락하고 매료되었음을 암시한다. 새해로 넘어가는 새벽. 둘은 사랑을 나눈다. 캐롤이 테레즈에게 한 대사. “나의 천사..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온..” 영화에서 대사를 통해 사랑 고백을 하는 것은 사랑을 나눌 때 처음 나온다. 나는 여기서 영화 《아가씨》에서 김민희가 독백하듯 내뱉는 대사가 생각이 났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이 둘의 여행은 끝까지 행복하지 못했다. 캐롤의 남편이 사람을 붙여 그녀들을 미행했고, 그녀들이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옆방에서 녹음했던 것이다. 캐롤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자 딸을 빼앗고자 하는 남편. 급하게 되돌아가는 차 안에서 테레즈는 자신 때문이라 자책한다. 캐롤은 “널 위해, 널 놓아줄게”라는 편지를 남기고 이별을 고한다. 시간이 지나 만난 캐롤과 헤어지고 친구들의 모임으로 가는 차 안. 테레즈는 캐롤의 집으로 가 던 길 바라보았던 이슬 맺힌 창문 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그녀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는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이 유행하던 시기라 그 시대에 맞는 의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잘록한 허리라인과 둥근 어깨선을 강조한 의상은 50년대 유행했다는 옷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됐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세미 정장을 고급스럽게 차려입고 나오는 캐롤. 빨간 매니큐어, 빨간 스카프, 빨간 코트. 감독은 그 당시 동성애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캐롤의 강인한 여성성을 ‘빨간색’에 비추어 보여주는 듯했다. 그에 반해 약간 촌스럽지만 수수하고 모성애가 느껴지는 테레즈. 짧은 앞머리에 후드 재킷과 색동 베레모를 쓰고 나오는 그녀는 성숙한 캐롤의 모습에 대비를 이룬다. 테레즈의 수수한 체크 원피스라든지 단출한 헤어밴드는 극 중 캐롤과의 계급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동성애’ 코드를 부드럽고 달콤한 그러나 강렬한 색감으로 물들인 느낌이다. 그녀들의 사랑은 화려하게 치장된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닌 순수한 묘목 같다. 장식품이 아닌 소복이 앉은 하얀 눈이 더 어울리는. 소재를 넘어서는 성숙한 사랑. 금기된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일 뿐이다. 원작은 테레즈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영화는 누군가의 시선을 좇자면 캐롤이다. 아마 영화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케이트 블란챗의 노력 때문 아니었을까. 몇 번이나 엎어질 뻔 연기된 영화를 6년 넘게 놓지 않고 있었다니 말이다. 그리고 케이트 블란챗을 동경했던 루니 마라 역시 따로 감정을 몰입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이미 충분히 여배우로서 그녀를 사모하고 있었으므로. 두 여배우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영상미에, 우울하지만 매료되고 싶은 감수성에 젖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