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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ug 30. 2018

코끼리를 타지 마세요

애슐리 벨, <코끼리와 바나나(Love & Bananas)>

육상 동물 가운데 코끼리만큼 거대하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지닌 동물이 또 있을까.   


알면 알수록 코끼리는 놀라운 동물이다. 가족을 잃으면 슬퍼하며 식물로 사체를 덮어줄 줄 아는 자각과 공감 능력을 가졌다. 생태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코끼리의 이주는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식생의 변화를 가져오는 토대를 제공한다.   


그런 코끼리는 잔혹한 인간에 의해 수난의 역사를 걸어왔다. 코끼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 일부에 서식한다. 아시아 코끼리는 4만5000마리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중 3분의 1은 포획 상태에 있다. 포획된 코끼리는 인간의 편의와 오락을 위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코끼리와 바나나>는 태국에서 벌목이나 트레킹, 코끼리 쇼 등에 동원되는 아시아 코끼리의 현실에 주목한다. 코끼리들은 관광 산업에 이용될 수 있도록 모진 훈련과 학대를 받는다. '크러쉬 박스(crush box)'라 불리는 작은 우리에 갇혀 쉴 새 없이 맞고 '불훅(bullhook)'으로 고문 당하며 야생성을 잃어 간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코끼리는 오랜 기간 벌목 산업에 동원되어 왔는데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해 발이 뒤틀리거나 지뢰를 밟아 불구가 되기도 한다. 또 코끼리 상아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에 불법 도살이 자행되고 있다.


배우 겸 감독인 애슐리 벨은 태국 태생의 코끼리 보호 활동가 생두언 렉 차일럿과 함께 특별한 미션에 착수한다. 평생 사슬에 묶여 트레킹에 동원된 70세 암컷 코끼리 '노이나'를 구조하여 렉이 치앙마이 근교에 운영 중인 코끼리 자연농원까지 약 500마일을 데려와야 하는 일이다.


학대 당하는 코끼리를 구조한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학대를 당하고 있는 수많은 코끼리를 구조하기에는 돈도 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다. 코끼리를 구조하려면 코끼리 소유자를 설득하거나 돈을 주고 사오는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노이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다.


노이나를 이동하는 데에만 하루가 걸리는 구조대의 긴박한 여정은 지켜보는 이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마침내 자유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 노이나의 눈빛을 볼 때 마음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인간에게 속박된 코끼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코끼리를 노역의 대상, 오락의 도구로 소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상 코끼리 잔혹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코끼리와 바나나>는 일생을 코끼리 보호 활동가로 살아온 렉의 신념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트레킹 캠프를 운영하는 가족들의 회유와 비난에도 그녀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활동가의 자세란 무엇인가를 곱씹어 보게 된다. 나는 활동가로 일하던 때에도 렉과 같은 사람들의 눈빛을 지녀본 적이 없다.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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