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산 페드로, 유유자적한 날들
- 산 뻬드로에서 유유자적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스페인어를 배우며 한량처럼 지냈다. 카페를 전전하며 스페인어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했다. 어느 날 오후 카페에 머물던 중에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미처 우산을 챙겨 오지 못했기에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소나기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구름처럼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옆자리엔 실루엣으로만 간신히 보이는 까만 고양이 손님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채식 메뉴를 지원하는 음식점과 카페가 많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곳이 많아서 선택의 폭이 넓다. 분위기 좋고 음식도 맛있어서 자주 가던 식당이 있는데 그곳 메뉴 중에 베지 파히타(Fajitas vegetarianas/Veggie fajitas)가 일품이었다. 파히타는 원래 구운 쇠고기나 닭고기를 또르띠야에 싸 먹는 음식인데 베지 파히타는 온갖 채소의 향연이다. 양도 아주 많다. 과카몰리와 감자튀김까지 더해져 푸짐한 성찬을 즐길 수 있었다.
- 산 뻬드로에서 보낸 일주일을 보냈다. 이렇다 할 만남도 사건도 없이 빈둥거리는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작고 한적한 마을이 주는 아늑함에 취한 날들이었다. 잠시 머물다 훌쩍 떠나고 마는 처지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상에 지나지 않겠지만. 아, 스페인어 과외는 만족스러웠다. 스페인어 학원에 등록해 국제학생증을 발급받고자 했던 애초의 계획은 잊은 채 숙소 주인이 소개해준 마리아에게 스페인어를 배웠다. 여느 동네 아주머니와 다를 바 없는 풍모를 지녔지만 마리아는 내게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 낯선 잠자리 탓이었을까. 매일 새벽 여섯 시가 되기도 전에 절로 눈이 뜨였다. 그 덕에 거의 매일 동이 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상은 늘 되감기라도 하듯 반복됐다. 너무 익숙해서 질릴 만한 풍경 안에서 언제나 다를 바 없는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마을 주민이든 여행자든 서로 눈만 마주치면 “올라”를 주고받았다. 카페에서 스페인어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영화를 보았다. 노트북에 담아온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체 게바라> 1,2부를 보았다. 중남미에서 이 영화들을 보면 감흥이 남다를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일 줄이야.
-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욕구를 뒤로 하고 산 뻬드로와 작별을 고해야 했다. 좁은 방 안에 이리저리 자리를 잡고 있던 짐을 다시 한데 모아 배낭에 욱여넣고 길을 나설 때 다시금 실감했다. 이곳에 정은 들일지언정 적은 둘 수 없는 신분이란 걸. 모래사장의 씻겨 나간 발자국처럼 내 흔적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