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 서평
『한국이 싫어서』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계나’는 한국을 떠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그리고 그 뒤에 ‘무턱대고 욕하지는 말아 달라’는 당부를 붙이며 독자들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계나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민을 준비하는 수만 가지 이유와 그래야만 하는 행동의 정당성은 결국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나로서는 그래야만 했다고 정의 내린다.
계나는 스스로 한국이라는 정글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멸종 위기에 임박한 동물 같다고 표현하며, 이러한 ‘동물’의 신분에 놓인 자신이 한국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한국이 싫어서』는 당당하게 ‘한국이 싫다’고 이야기하며 스스럼없이 국경을 넘는 계나의 기나긴 독백이다. 일찌감치 계나는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판에 박힌 공식의 성공담을 믿지 않았다. 계나는 한국사회의 최약체로 태어나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며 고통을 받느니 한 번도 겪지 못한 낯선 사회로 들어가 아무것도 모르는 ‘0’의 상태로부터 생활하기를 택한다. 한국을 떠나 호주에 입국하기 직전까지 계나가 겪어온 계나의 역사는 이런 결단을 뒷받침해준다.
『한국이 싫어서』의 장점은 계나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허울 없는 태도, 밑바닥까지 끌어내어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태도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각 잡고 사회성이나 공공성, 계급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 자리에서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이 필요했으며, 한국을 떠나 도착한 호주에서의 삶은 어땠는지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계나의 말에는 거침이 없다. 자신의 서 있는 자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자신이 태어난 울타리를 과감하게 벗어나지 않으면 평생 이대로 눈물을 이따금 삼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계나는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 때문에 계나의 이야기는 때론 슬프도록 냉정하게 들린다. 『한국이 싫어서』는 자신이 받은 수많은 상처와 좌절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계나’라는 인물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직시한다. 한국에 태어난 ‘한국인’으로서, 국경을 넘는 순간에도 예기치 못하게 터진 생리를 안고 가야만 하는 ‘여자’로서, 우여곡절 끝에 입국하게 된 호주의 ‘이방인’으로서 그리고 서구권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아시아인’으로서 말이다.
장강명의 소설은 ‘지금’을 살아가는 한국의 2, 30대들에게 지침서와 같은 존재다. 근작인 『산 자들』에 수록된 단편들이나 이전에 발표된 『표백』 『당선, 합격, 계급』 등을 통해 그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위치와 입장에서 ‘한국 사회’라는 틀을 있는 힘껏 짜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강명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익숙하지만 낯설어지고 싶고(또는 외면하고 싶고), 낯설지만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동정해야만 하는) 인물들이다. 한국사회의 구조에 억압되고 사로잡혀 이쪽으로 저쪽으로 가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우리 안을 버텨내야만 하는 사람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도 이 우리 안에 놓여있던 인물이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에게 다가올 ‘멸종 위기’의 두려움을 벗어버리려 한국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한국을 벗어나 호기롭게 호주로 뛰어든 계나가 순탄하고 평온한, 그야말로 유토피아적인 일상을 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나는 호주에서 한국보다 때로는 훨씬 암울하고 상상도 하지 못할 사건과 사고를 겪기도 한다. 하지만 계나는 호주에서 새롭게 시작한 자신의 일상이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견딜만하다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호주에서는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거든.” 계나가 결국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나는 행복해질 거야”라고 다짐하는 그녀의 현재는 밝아 보인다. 자산성 행복과 현금성 행복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단언하는 계나의 모습은 결국 ‘선택’의 문제 속에 끊임없이 표류하는 우리의 거울이다. 직진을 하든 커브를 틀든 모두가 각자의 지향점을 향한 선택의 기로에서 ‘옳음’을 고민한다는 것. 계나의 선택은 단지 그 갈림길에서 ‘호주’라는 변화구를 던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