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몇 개월의 일요일은 오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오후에는 수영을 하며 보내곤 했다. 한여름이 가기 전에 한강수영장을 가보고 싶었던 이유 때문에 시작했던 주말 수영장 행은, 몇 년 새에 단 한 번도 수영장 레인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는 스스로도 놀랄 사실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새 수영복을 주문했고 몇 가지 필요한 용품들을 샀다. 자전거 용품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물품들이 늘어났다.
지금 입고 있던 수영복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샀던 아레나 청소년용 남색 수영복이다. 패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지만 어쩌다 보니 30대 중반의 지금까지 잘도 입었다. 어째서 초등학교 때의 수영복이 지금까지 맞았는가 하면, 할 이야기는 딱히 없다. 팔과 다리만 길게 늘어났는지,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조숙한 편이라 그에 맞춰 수영복을 샀는지, 그때의 내 몸이 생각나지 않아 알 길이 없다.
수영복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불과 몇 달 전, 끈 부분이 너덜너덜해져 곧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부터였다. 사실 엉덩이가 맞지 않은 건 꽤 오래전이었지만 그건 버틸 정도였는데, 끈이 위태하다는 건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을 좀 하다가 같은 브랜드에서 좋아하는 색상인 보라색의 반신 수영복을 샀다. 한 시간 반 동안 실험을 한 결과 확실히 달랐고, 확실히 좋았다. 이전의 수영복은 어떻게 입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에 대한 무서움이 전혀 없는 나는 사실 라이프가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뭐, 일단은 준비만 하고 있다. 뭔가 거창한 의미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유사시에 대비해서 주변인들을 지켜줄 확실한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작년 겨우내 생에 손꼽을 만한 암흑기를 보내고 올해 초에 안팎으로 크게 아프게 되어 기약 없이 미뤄두고 있었다. 다른 모든 인명구조 자격들이 그렇겠지만, 해양 라이프가드는 절대적으로 정신과 육체의 균형이 일정하게 맞아야 딴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순간을 다투는지라, 몸이 최상이어도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하면 실격하고 만다. 나 같은 경우에는 둘 다 문제가 있었고, 결국 그때 치르는 시험을 보지 못했다. 뭔가 ‘짠’하는 마음으로 자격증을 내밀고 싶었는데 말이다.
시험에 나오는 것들을 오늘 올림픽수영장 레인에서 좀 복습해봤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포지션이었는데, 이따위로 하면 유사시나 비상시에 내가 먼저 죽겠구나 싶어 정신이 확 드는 순간이 있었다. 2미터 레인에서 놀던 나는 5미터 레인에서 라이프가드 강습을 받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쥐를 호소하며 레인 밖으로 나오는 분들도, 그만두고 집에 가는 분들도 있었다. 딱 봐도 상위권인 강습자들을 보며, 저렇게 빠른 속도로 자유형-평형-접영을 구사하려면 지금의 나는 정말 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얕은 물보다는 깊은 물이 좋고, 아득하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영장 레인을 가쁜 숨으로 가로지르는 느낌이 좋다. 가령 레인 중간에 갑자기 바닥이 낮아지며 발이 닿지 않는 지점, 나는 그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중력으로 더 이상 설 수 없게 되어 물의 힘을 빌려야 할 때, 옆의 레일을 잡고 싶지 않고 내 호흡과 팔다리의 움직임 만으로 저 끝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물 안으로 고개를 넣을 때 나의 거친 호흡과 차근차근 들려오는 내 물장구 소리 만이 이 세상에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음이라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들이 좋다. 그걸 견뎌내고 나서 숨을 고르며 레인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나의 모습이 좋다. 그렇게 헐떡이고 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숨’이라는 것을 쉬는 한 인간임을 너무도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수영장 레인 끄트머리에 붙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보통 수영은 다른 스포츠와 다르게, 호흡에서 완전히 차단되는 환경에 뛰어드는 것이므로 물 안에 있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특히나 레인을 여러 번 주파한다는 마음을 먹고 출발하면, 준비운동을 잘하지 않아 쥐 때문에 멈출지언정 딴생각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가드레일을 잡아 끄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늘은 멀뚱히 레인 가장자리를 잡고 떠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마도 오랜만에 수영장에 가니 다른 생각이 섞여서 인지, 아니면 내가 무기한 미뤄두었던 것을 위해 도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한 건, 어떤 질투나 치기가 아니라, 그냥 ‘수영’이라는 바운더리 내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판단하는 그런 순간들이었다는 것, 나쁘지 않았다는 것. 바닥을 경험했으니 이제 나아지만 하면 된다는, 같잖고 뻔한 교훈을 진심으로 되새김질하게 되던 오후였다.
인어처럼 물속의 세상을 유영하진 못해도 나는 물 안의 내가 반드시 언젠가는 물 밖으로 떠오르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없다면 이렇게 수영을 좋아할 리도, 아마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확신은, 어느 순간에나 유용하다. 삶의 기로가 걸려있는 것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