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숫자들 '슈거 오브 마이 라이프' 초단편 노래 소설
지하철 역 근처 크리스피크림에서 약속을 잡은 것은 실수였다. 날씨가 갑자기 영하로 떨어져서 잠시 추위를 피할 수 있을만한 곳을 찾다가 카페 대신 빵집을 찾았건만, 그 대수롭지 않은 선택이 이렇게까지 고역이 될 줄은 몰랐다. 분명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설탕을 잔뜩 바른 도넛들을 보니 군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의 혓바닥 전체가 기억하고 있는, 저 촉촉하고 자극적인 단맛. 차라리 그냥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고통받진 않았을 텐데. 카페에서 파는 빵들은 저렇게 자극적인 설탕 덩어리의 모형을 하고 있진 않으니까. 게다가 이런 달달한 내음도 매장에 잔뜩 풍기고 있진 않을 테고 말이다. 탐앤탐스나 스타벅스, 뭐 그런 데를 가는 거였는데.
“따듯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더 나쁜 마음이 들기 전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해버렸다. 글레이즈드 하나를 같이 주문할까 생각해봤지만 침을 꿀꺽 한 번 삼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돌아서버렸다. 아르바이트생이 건네 준 머그잔에 가득 담긴 까만 커피를 받아 들고, 쇼케이스에 진열된 도넛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한 곳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짱 박혀 소설이나 읽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석에 있는 자리였다. 하긴 그랬다면 저 설탕 가득한 도넛들을 1시간에 1개씩 집어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소설이 눈에 들어올 리 있나, 저 설탕 덩어리들을 두고. 나는 짧게 쳇, 하고 볼멘소리를 내었다.
ㅡ어딨어요? 상수 씨 안 보이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기호가 문자를 보냈다. 고개를 쭉 내밀고 매장 입구 쪽을 바라보니 기호가 코트를 탁탁 털며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ㅡ거기서 세시 방향. 네 거기, 그쪽으로 쭉이요.
기호는 나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아니 왜 이렇게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요? 찾기 어렵게.”
기호는 두터운 회색 코트를 곱게 벗어 옆에 있던 의자에 두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는 턱에 괴고 있던 쿠션을 한껏 끌어안으며 역시 퉁명스러운 말투로 입구 쪽을 보며 대답했다.
“저기 저거 때문에요, 쟤네들 때문에.”
기호는 고개를 돌려 내 눈빛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더니 곧 푸핫,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니, 왜요. 아르바이트생이 취향이 아니었어요? 아니면 추파라도 받으신 건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아래쪽이요. 사람 말고 도넛. 글레이즈드.”
기호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좀 더 고개를 빼고 입구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엉? 그러니까 저 도넛 때문이라고요? 도넛 공포, 아니 환 공포증 뭐 그런 건가요? 기호는 자리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내 눈을 들여다봤다. 나는 갑자기 훅, 가깝게 들어오는 기호의 몸짓에 흠칫 의자와 쿠션을 뒤로 밀었다.
“그런 건 아니고 다이어트 때문에요. 저 요즘 몸이 좀 불어서... 이렇게 살도 찌고.”
나는 두 손으로 옆구리를 잡아 길게 빼는 시늉을 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기호가 다시 푸핫, 소리를 내며 웃는다.
“아니 왜요 상수 씨 딱 좋은데.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딱 제 취향인데요.”
기호의 ‘제 취향’이라는 말에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벗겨보면 다를 건데...’라고 말을 붙였다. 먹는 걸 줄인다고 살이 급격하게 빠지진 않겠지만 나는 운동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저 악마의 음식 글레이즈드 같은 것만 피하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기호는 그런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매장 입구의 도넛 쇼케이스 앞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기호에게 끌려온 나는, 그토록 보지 않으려고 간절히 노력했던 반짝이는 글레이즈드들과 눈을 맞추었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 미란다가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할 때 이 글레이즈드를 보고 엄청 고민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요, 같은 프로그램에서 만난 남자랑 글레이즈드 찬양을 하면서 둘 다 이건 악마의 음식이라고, 이거 하나 칼로리가 몇 인지 아느냐고 성토하는 장면이 나와요.”
글레이즈드 두 개랑요, 글레이즈드 사워크림 하나 주세요. 기호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도넛을 주문하며 말을 이었다.
“그 두 사람이 글레이즈드를 앞에 놓고 어떻게 합의를 봤냐면요, 글레이즈드를 맛있게 먹고 그 칼로리만큼 함께 운동을 해서 빼기로 했어요. 섹스로요.”
기호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멀뚱히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도넛을 포장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4,100원입니다. 도넛 포장을 끝낸 아르바이트생이 기호에게 건조한 말투로 도넛 봉투를 건넨다.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나 지금 애프터 신청하는 거예요, 상수 씨한테.”
기호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받아 든 도넛 봉투에서 글레이즈드 하나를 꺼내 나의 입가 가까이에 들이밀었다. 하얗고 얇은 종이에 싸여있는 글레이즈드에 코팅된 설탕 덩어리들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고 나는 종이를 떼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그 영롱한 글레이즈드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 속에서 침과 섞인 채 혀 전체에 밀려드는 글레이즈드 조각의 자극적이고 부드러운 단 맛. 글레이즈드가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영 이 맛을 모른 채 살았을까. 아니, 어떻게든 단 것을 찾아 입에 욱여넣었겠지만, 글레이즈드의 단 맛을 모르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한 것이었을까. 오랜만에 맛보는 황홀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기호를 바라보며, 나는 글레이즈드의 나머지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세상에서 맛보았던 단 맛 중 가장 자극적인 두 가지 맛이 지금, 나의 입과 눈에 동시에 머물고 있다. 이 맛을 영원토록 잃고 싶지 않아 나는 입 속에서 침과 함께 서서히 녹아가는 글레이즈드의 설탕 조각들을 아주 오래도록 굴리고 또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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