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별로라고 느껴질 때

인간실격

by 단비

요즘 JTBC에서 하는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마흔이 넘도록 아무것도 되지 못한 한 여자와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스물일곱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내용만으로도 우울과 고독과 허무가 예측되어 보지 않으려 했는데 내 최애 배우 류준열과 전도연이 나온다고 해서 찾아보게 된 드라마이다.


마흔이 넘은 여자 부정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버지, 난 아무것도 못 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 됐어.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아서 외로워 아버지.

- 인간실격 1화 -


저 대사를 들으며 생각했었다. '저 대사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됐으면 좋겠다. 그냥 지루하고 답답한 드라마여서 뭔 소리인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안보는 드라마였으면 좋겠다. '

그런데 난 저 대사가 무슨 말인지가 뼛속까지 이해되었고 어느새 눈시울이 벌게져 있었다. 심지어 부정이는 나보다 낫네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 속상해하실까 봐 저런 말하지도 못할 텐데..


난 마흔셋이 되도록 엄마가 되지도 못했고, 양가 부모님에게 원 없이 효도할 만큼 부자도 아니며, 직업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2년이 넘도록 시험관 한다고 아이를 갖는 것에만 올인해 왔다. 취업도 하지 않고 주일학교 교사도 내려놓고 심지어 코로나 시국에 교회를 가는 것도 자제하며 온라인 예배만 드렸다.

2년을 올인했는데 심지어 시험관 4차 때는 육지 부모님 댁에 올라가 민폐를 무릅쓰고 두 달이나 있었다.

삼시세끼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설거지도 안 하고 누워있고 2~3일에 한 번씩 춘천에서 평촌까지 아빠가 운전해주시는 차를 타고 병원까지 왔다 갔다 했다. 드디어 임신에 성공했나 싶던 찰나 자궁외 임신으로 왼쪽 나팔관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고 입원하고 퇴원하고 나서 제주 집에 내려와서까지 부모님 신세를 지고 있다. 내가 육지에 올라가 있는 두 달 동안 엉망이 된 집을 치워주시느라 몇 주를 고생하시고도 수술한 딸이 집안일을 제대로 못하니 밥이며 빨래며 마당 잡초뽑기며 온갖 집안일을 해주고 계신 부모님을 바라보며 감사함과 죄송함 저 너머로 나의 무능함과 무기력함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23일 엄마 생신 때 리마인드 웨딩을 콘셉트로 가족사진을 찍어야지 생각하며 엄마 드레스를 주문했다. 파티 커튼과 풍선과 화관과 아빠 나비넥타이도 주문했다. 동생과 이야기해서 23일 날 집에서 드레스코드 맞춰 가족사진 찍어야지 혼자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엄마 아빠가 육지로 올라가시던 날. 엄마 허리를 잡으며 "엄마 허리살 좀 빼셔." 하는데 우리 엄마 "옷 같은 거 주문하지 마. 그런 거 안 입어. 생일날 뭐 사진 찍으려 그러는 거 아냐? 내 맘에 드는 거 아니면 안 입어. 쓸데없이 돈 쓰지 마!" 하셨다. 눈치 백 단인 우리 엄마. 며칠 전 내가 아빠 정장 입을 거 있냐고 물어보고 엄마 가슴 사이즈도 재고했더니 생신 날 뭔가 하겠구나 눈치를 채셨던 거다. 호불호가 강해 싫어하는 건 죽어도 안 하고 어떤 선물을 해 드려도 좀처럼 취향을 맞추기가 힘들어 선물로 현금을 제일 좋아하시는 엄마지만 급 서운함이 밀려왔다. "엄마, 자식들이 뭔 준비를 해드리면 그냥 좀 못 이기는 척하고 같이 분위기 맞춰서 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받는 것도 중요한 거야." 어쭙잖은 충고를 했다.

가뜩이나 마흔이 넘어 부모님 신세 지는 것이 부담되고 스스로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던 마음이 가시처럼 턱 하니 걸려 있던 차에 엄마의 말이 꼬임의 바람을 타고 내 마음에 꽂혔다. 마음이 뾰족뾰족해졌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 생신을 위해 준비한 내 마음마저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한바탕 퍼붓고는 아무렇지 않게 제주공항으로 모셔다 드렸다.


귀가해서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급 현타가 왔다.

나 진짜 별로인 인간이구나. 엄마도 못되었고, 착한 딸도 못되었고, 커리어가 빵빵한 직장인도 못되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부자도 아니구나.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죄송을 느끼는 엄마에게까지 뾰족한 마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드러내 버리다니. 종지보다 작디작은 마음의 그릇을 가지고 꾸역꾸역 매일매일을 버티고 살아가고 있구나. 그렇다고 믿음이 좋아서 이 와중에 하나님과 24시간 동행하며 매시간을 예배로 찬양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어떤 날은 원망했다가 어떤 날은 그래도 믿어볼게요 밀당했다가 그렇게 겨우겨우 매일을 살고 있구나. 마음이 엄청 가난하구나.

나라는 인간 정말이지 너무 별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한숨 한 번에 흩어져버릴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듯 후드득후드득 허벅지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하필 현타가 화장실에서 오다니.


난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멍 때리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느닷없이 큐티가 하고 싶어졌다.

오늘의 말씀을 꺼내 읽는데 말씀이 마음의 스토커처럼 나를 위로한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렘 31:3)

영원한 사랑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내 일관성을 이해할 수 없단다. 감정은 다양한 환경 앞에서 깜박거리고 흐릿해지는데, 너는 그 변덕스러운 감정을 내게 투사하는 경향을 보이지. 이런 까닭으로 한결같은 내 사랑의 혜택을 네가 전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거란다.
너는 환경의 끝없는 변화 그 너머를 보면서, 사랑의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임재를 인식하면 너는 강해지는데, 내 사랑을 받고 거기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내 사랑이 너에게 끝없이 흘러들도록 해주렴. 내 사랑이 끝없이 너에게 흘러드는 것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가 필요하다.


그렇지. 변한 건 하나님이 아니셨구나. 이 모든 상황과 환경을 만드신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 큐티는 하나님의 단비수진 사용법인가 보다.


설거지를 하며 유튜브로 ccm을 찾아 듣는다. 랜덤으로 틀어놓은 찬양이었는데 '주가 필요해' 찬양이 끝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모습 이대로'가 흘러나온다.

아. 그렇지. 나 스스로 너무 별로라고 느끼고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이셨지. 내가 엄마가 되어서, 부자여서, 마음이 넓은 훌륭한 사람이라서 날 사랑하는 게 아니셨지.

난 지금,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 후에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곁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지.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
연약함 그대로 사랑하시네
나의 모든 발걸음 주가 아시나니
날 인도하소서

주의 날개 아래 거하는 것
주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가장 큰 소망
나의 가장 큰 은혜
주와 함께 동행하는 일

- CCM 내 모습 이대로 -


다시 또 펑펑 눈물을 쏟는다.

'이런 분이 나의 하나님이라서 감사하다.'는 말도 목이 메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감사하다.

그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어서 참 다행이다.


이거 참. 나이 들어 울면 더 늙는데 말이지.

거울이 어디 있더라.



함덕 바다. 석양은 아름답지만 왠지 쓸쓸해보여서 하루를,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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