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과하게 실려버린 그 말
오늘은 학교에 갔다. 재미있었다.
방 한 켠에서 옛날 일기를 발견했다. 귀찮음이 느껴지는 짧은 일기도 왠지 기특하게 느껴진다. 그중 쉽게 넘겨지지 않는 어느 한 페이지의 일기도 있었다. 그날은 아빠가 엄청나게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겠다며 라면을 만들던 날이었다.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는 나는 아빠에게 면을 많이 익히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끓인 라면은 아빠의 취향대로 계란이 듬뿍 들어간 불은 라면이었다.
꼬들꼬들한 라면은 ‘진짜 라면’이 아니라고, ‘진짜 맛있는 라면’을 먹으라는 아빠의 말. 괜한 아빠의 고집에 나는 나대로 기분이 나빴던 것인지, 대뜸 화를 냈고, 버릇없는 나는 혼나고 말았다. 결국 라면은 한 젓가락도 먹지 못한 채 방으로 쫓겨났던, 당시의 억울함이 뚝뚝 묻어나던 일기. 처음부터 불리했던 싸움이었네. 생각하며 일기를 덮어버렸다.
버르장머리가 없네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말이 돌이킬 수 없는 판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애를 먹는 아이들이 있다. 규율과 규범이 톱니바퀴처럼 짜여 굴러가고 있는 이곳에서 엇나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른과 술을 마실 때는 고개를 돌려 마셔야 하며, 어른이 하는 말에는 토를 달지 않는 것. 일방적이라고 억울할 새는 없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따르는 일에는 의심할 필요도, 의심을 하는 이도 없으니 그저 수용하는 수밖에.
버르장머리. 그건 엄마 손을 잡고 다녀야 하는 일 같아서 놓치면 혼나기도, 헤매기도 한다. 정신없는 길바닥을 돌아다니다 꼭 붙들고 있던 엄마 손을 놓쳐 버리는 것처럼. 손을 놓친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진부한 재판이 열린다. 말대꾸를 해도, 억울함을 호소해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너는 버르장머리가 없어. 탕탕. 말 한마디로 언쟁은 종결되고 논점은 흐려진다. 처음 논쟁이 시작된 계기나 아이의 입장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곧 법이기에. 그리고 아이들은 톱니바퀴에 자신을 주섬주섬 끼워 넣거나, 튕겨 나간 채로 고립된다.
왕관의 무게에 대해
마땅히 지켜야 할 예절과 의리. 예의.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이 단어의 기준은 한국의 물가처럼 야금야금 상승했다. 나이는 상하 위계질서를 철저하게 가르고 휘두를 수 있는 지위로 변모했고, 이 위계질서 앞에서 서열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버르장머리라는 단어에 힘이 실린 건 그때부터였을까. 얼굴조차 모르는 선배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버릇없는 행동이 되었고, 아랫것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어른. 이 고귀한 단어의 기준도 함께 높아져야 하지 않을까.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어른은 몇이나 있을까. 존중은 어른만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집을 나오면서 붙들고 있던 엄마 손을 놓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아이는 없다. 엄마는 실수한 아이의 엉덩이를 따끔하게 때리고, 또 털어주면서 다시 손을 잡아준다. 아이들은 어차피 넘어지고 혼나면서 배울 테니. 그러니 버르장머리를 놓치는 아이들을 보더라도 가끔은 눈 감아주시길. 어른이라면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