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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Jun 26. 2023

참을 수 없는 약속의 가벼움

다시 약속을 숭고하게 여겨보기로

친구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던 대학 시절, 쉴 틈 없이 약속을 잡았다. 오늘 뭐 해? 로 시작하는 가벼운 약속부터 2주 전에 미리 공들이는 약속까지.


가기 싫은 약속도 핸드폰에 꾹꾹 저장해 두곤 눈코 뜰 새 없이 집을 나서기 바빴다. 그리고 약속 중에도 지치지 않고 또 다른 약속을 만들었다.


다음 주에 내 친구랑 같이 볼래? 우리 나중에 저기 꼭 가보자. 내년 이맘쯤 여행 갈까?


그냥 하는 말. 그냥 잡는 허황된 약속이란 것을 알면서도, 믿어주는 척 넘어갈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이나 애정을 담은 어떤 말들. 하지만 크게 연연하진 않는다.


나도 그런 허황된 말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그리고 어쩌면 그때 할 수 있던 가장 적절한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약속의 무덤들이 쌓여갔다.


어린 내게 약속은 숭고한 것이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귀에 닳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약속이 대단한 무언가인 줄 알았다. 새끼손가락에 걸린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엄숙하게 고백하기도 하며.


여행 가이드였던 엄마는 며칠씩 자주 집을 비웠다. 그리고 가기 전, 내게 몇 밤을 자고 올 예정인지 달력을 집어주곤 여행길을 떠났다. 나는 엄마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하루도 빠짐없이 달력에 표시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대망의 ‘엄마 오는 날’이면 침대 옆 창문으로 목이 빠져라 엄마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지쳐 누워 있다가도 둘둘둘 캐리어를 끄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창 밖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새카만 밤이 지나고 초저녁 같은 새벽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오늘 오지 않는구나. 아무리 달력에 표시해도 지켜지지 않는 약속도 있구나. 갈비뼈 안쪽이 아파와 결국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비슷한 기분은 커서도 종종 느꼈다.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당연해져 버린 약속들. 연연 해할수록 속상함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평생 함께하자던 남자친구는 마음이 떠났음을 전했고, 이번 주는 꼭 보자며 신신당부하던 친구는 결국 또 그다음 주로 약속을 미뤄버리고 말았다. 약속했잖아! 하고 외치고 싶은 말이 갈비뼈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어느 여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일산의 새로 생겼다는 밤리단길의 골목을 산책했다. 초록이 빼곡한 어느 길목을 걷다 문득 이 순간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하는 감상에 젖기도 했다.


어디 하나 특별하지 않은 산책이었지만 확실하게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음에 또 보자는 흔한 약속의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하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지금 우리가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다시 약속을 숭고하게 여겨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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