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출근
눈을 뜨니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보여
0.5초 정도 놀랬다.
그러곤 바로 일어났다. 낯선 방, 이른 시간조차 생소한 출근 첫날이다.
단정해 보이는 갈색 코트를 걸치고 집 밖을 나섰다. 막 나뭇잎이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한 가을 초입, 익숙한 것 하나 없는 이 모든 게 어느 꿈속 하루 같았다.
눈만 깜빡하면, 일산 집에서 깨어날 것만 같다. 며칠 전만 해도 슬리퍼를 끌고 파스쿠찌를 가던 것이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에나멜 구두 따위를 신고 양재에서 판교로 출근하고 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선명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거슬리기도, 야릇하게 들리기도 해서 까치발을 들고 미끄러지듯 지하철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출근 시간의 열차 안에는 사람들이 많다.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선 열차 안은 괴이하리만큼 적막하다. 열차가 달리는 소리만 공간을 채우고, 그에 어울리지 않은 상냥한 지하철 안내음만 간간이 들린다.
흔들리는 열차와 조용히 열차에 몸을 맡긴 사람들. 그리고 회사원 같은 내 옷차림. 이게 앞으로의 일상이 될 거라는 건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일 터였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첫 출근 중인 불안한 인턴으로 보이지 않으리라. 그게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어느 SF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것 같다. 무표정하게 출근을 하는 로봇들과 그 속에 숨어든 주인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벌써 내릴 정거장이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겨우 두 정거장이다. 자취의 편리함에 새삼 놀라며 사람들과 우르르 열차를 빠져나왔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회사 유리문 앞. ID 카드가 없는 나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인사팀에 연락해볼까. 핸드폰을 드니 유리문 건너편으로 누군가 내게 밝게 인사를 했다. 면접에서 본 깐깐해 보이는 여자였다.
왔어요? 나 홍보팀 주 이사예요.
아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했다. 화면으로 볼 땐 매몰차 보였는데. 밝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니 다른 사람 같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인사를 건넨 그녀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소싯적 귀엽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은 동안 얼굴이었지만, 단단해 보이는 눈과 턱을 보니 쉬워 보이는 인상은 아니다. 그게 내 상사, 주 이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파주에서 출근한 거예요?
그녀가 물어봤다. 집이 좀 멀다고는 말했는데, 그게 첫 질문일 줄이야.
솔직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파주가 멀어 자취를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힉하고 놀라더니, 미안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 어떡해, 파주라고 해서 혹시 했는데, 이사를 했다고요? 괜히 미안하네.
그렇다. 3개월 인턴 자리에 덜컥 사는 곳을 옮길 만큼, 나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 간절함을 들킨 것 같아 입안이 씁쓰름했다.
주 이사의 뒤를 따라 엉거주춤하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짧은 복도를 지나 들어선 널찍한 사무실은 자리별로 파티션과 테이블이 빽빽하게 깔려있다. 도서관 같은 분위기였다.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해 보였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다들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를 힐끗 보곤 다시 건조하게 모니터로 눈을 돌리는 직원도 있었다.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치며 90도 인사라도 해야 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 팀은 홍보팀으로 총 4명이었다. 주 이사와 여자 차장, 남자 대리, 그리고 나. 여자 차장은 170이 훌쩍 넘어 보이는 큰 체격에 반듯이 자른 단발머리로 다부진 느낌이 있었다.
자신을 샴쓰라고 소개하는 차장은 굉장히 살가웠다. 자신도 이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는 게 많으니 서로 도와주며 잘 지내보자며 인사를 건넸다.
샴 차장은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기도, 물어보기도 하며 내가 어색하지 않게 알뜰살뜰 챙겨주었다. 그리고 남자 대리는 외근을 나가, 내일쯤 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을 덧붙였다.
다음날은 홍보팀의 대리, 감을 만나게 되었다. 쾌활하게 악수를 청하던 감 대리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로, 펌한 염색 머리에 밝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주 이사의 방에서 회사와 팀설명을 듣게 되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들어와 정신없었지만 요약하지만 이러했다.
크게 네 사업부문으로 구분되는 이곳은 그 안에서도 사업부로 나뉘어 있는데, 인수한 회사들도 몇몇 있어 꽤나 복잡한 구조였다. 그리고 나는 주 사업부문의 업무를 도맡아 샴 차장과 주로 함께하게 될 예정이었다.
몇 가지 인사 등록과 프로그램들을 깔고, 자잘한 업무들을 했다. 그 이후는 회사에 대한 끝없는 교육이었다.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이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것들. 다 좋은 이야기들이지만 알듯 모를 듯 난해하고 재미없는 말. 차라리 업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너편에 앉은 샴 차장은 거침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다 통화를 하고, 노트북을 들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그 일련의 과정 속 동작들이 모두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는 샴 차장은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쁜 걸까. 나도 저렇게 바빠질까. 도움 줄 일이 있을지 물어볼까 했지만, 그것조차 실례일 정도로 바빠 보여서 관뒀다.
계속 강의만 듣고 있자니 좀이 쑤시고 지루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이 풀리지도 않는. 며칠간은 조금 잔인한 시간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