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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Aug 06. 2023

뼈저리게 현실적인 이삿날

04 이사

3개월 있을 건데 번거롭게 무슨 이사야.

됐어, 그냥 여기서 출퇴근할래.


처음 아빠가 회사 근처에서 자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때,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사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3개월 출근을 위해 사는 곳을 옮길 만큼, 간절해 보이는 게 싫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버스 하나 다니지 않는 파주 어느 동네였다. 회사까지 가는 데만 족히 2시간 이상이 걸려 현실적으로 출퇴근이 어려웠다. 결국, 양재 근처에 작은 방을 구하기로 했다.




밥그릇이나 수건, 이불 같은 살림살이들을 대충 챙기고, 옷을 몇 벌 챙겼다. 짐은 캐리어 하나, 박스 두 개로 생각보다 단출했다. 나중에 더 필요한 건 근처 마트에서 사기로 했다.


엄마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양재 꽃시장 근처의 어느 대로변 낡은 빌딩 앞이었다. 후덥지근한 오후,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가까스로 빌딩을 올려다봐야 했다.


빌딩 앞에는 보라색 바탕의 천 현수막이 걸려있었는데 굵은 흰색으로 < 여 성 고 시 텔 >이라고 큼지막하게 박혀있었다. 바로 옆에는 주유소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 그 주변엔 뭐가 없어 보였다.


화장실, 침대, 책상, 옷장, 작은 냉장고와 부엌까지. 작달막한 방에 있을 건 다 있었다. 다 연식이 꽤 있어 보이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3개월이라는 마음이었다.


생각보다 작다. 그치?


엄마는 작은 방구석 구석을 살펴보며 말했다. 여자 전용텔이라 안심이라든가, 옷걸이를 사야겠다든가, 이런저런 말을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며칠 전에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정규직은 전혀 안 되는 거냐. 역시 월급이 짜다며 쿡쿡 박히는 말을 하는 엄마에게.


인턴 자리에 뭘 바라느냐. 신입 주제에 그럼 월급 올려달라고 말하라는 거냐며 쏘아붙여 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오래 다니지도 않을 회사 얘기는 더 하지 말자며 엄마 입을 막아버리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물티슈로 이곳저곳을 닦아내던 엄마는 내 눈치를 살피며 회사 얘기를 꺼내는 중이었다. 너네 회사 찾아봤는데, 좋더라. 하며 또다시 슬금슬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응 그래. 맞아. 그렇더라.


등을 돌린 채로 무심하게 대답하며 박스에서 물건을 꺼냈다. 엄마는 뼈저리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봉이며, 복지며 하는 것들. 그게 나한테 어떻게 들릴 줄도 모르고. 방 안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 깐깐한 잔소리쟁이 엄마가, 딸내미 출근에 들떠있지 않은가.


차가 더 막히기 전에 돌아가야겠다는 엄마를 배웅하러 건물 밖으로 나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시간, 뺨을 적당히 쓸어내는 바람에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냉장고에 뭐라도 먹을 거 사둬. 군것질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여기 건너편에 식당도 많이 보이더라.


엄마는 그런 말을 남기곤 차를 몰고 사라졌다. 요즘 저녁을 군것질로 때우고 있었다. 그러는 엄마도 처녀 땐 입에 빵만 달고 살았다고 했으면서. 남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가방에서 떡하니 빵을 꺼내 먹었더라지. 아무렇지도 않게. 앞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 초연한 태도가 너무나도 엄마답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뭐 라건 아랑곳하지 않는 그 웃긴 순수함이.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은 빵이다.


돌아오며 내 옆방에 살고 있던 남자가 벌컥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말았지만. 여성 고시텔이라 안심이라던 엄마에게 차마 이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나머지 짐을 정리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가 있었다. 처음보다는 꽤 사람 사는 집 같았다. 할 일을 마치고 방바닥에 누워버렸다. 한쪽 머리는 벽에 닿을 듯 말 듯했고 발끝은 화장실 문 모서리에 닿았다.


옆 방에서 김치찌개 같은 걸 끓였는지 눅진하고 칼칼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왔다는 묘한 기분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기서 자도 되는 걸까. 누군가 방문을 덜컥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집에 얼마나 있게 될까. 혹시 3개월 전에 잘리면 어떡하지. 바로 방을 빼야 할까. 걱정은 계속 꼬리를 무는데, 눈이 자꾸 감겼다. 이대로 자 버리면 소원이 없겠지만,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내일은 출근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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