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준비
엄마, 그냥 인턴 3개월짜리야.
정식 채용 아니야.
전화로 변명 아닌 변명 중이었다. 전화기를 타고 엄마의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그게 어디야. 어디로 출근해? 언제부터?
카페 안은 마감으로 청소가 한창이었다. 테이블 사이사이로 힘차게 대걸레로 밀고 있는 직원이 내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밖으로 나갔다. 아까는 밝더니 그새 땅거미가 져버렸다.
옷도 사야겠네. 너무 정장 같은 거 아니더라도. 출근할 때 입을 만한 거 있어?
됐어, 뭐 하러. 많아, 옷.
건성으로 대답하며 바닥 보도블록 사이에 낀 이끼 같은 걸 발 앞코로 파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불편한 마음이 튀어 오르는데 내색하고 싶진 않았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카페나 통역 아르바이트만 주야장천 하던 딸이 정식 출근이라니까. 그것도 외국계에. 알면서도 모질게 말하고 싶었다.
정규직 전환 가능성 없는 거라고. 인턴 3개월 뒤에는 그냥 또 취업준비생일 테니. 그러니까 이런 걸로 좀 좋아하지 말라고. 우리 희망 고문당하지 말자고.
엄마는 이제 신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구두를 사야 하나 고민하는 엄마에게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한 채, 기계적으로 대답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얇은 남방 속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며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좋은 일인데. 언제부턴가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 좋은 일에도 뾰족하게 가시만 세우는 날 이해할 수 없다.
절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생각보다 쉽게 행복해졌는데. 원하는 사람이 되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에이 그게 어디야. 그렇게 말한 엄마였다. 어찌 됐든 축하받을 일이라고.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일상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별안간 든 생각이었다.
거실로 나오니 갓 설거지를 한 듯한 퐁퐁 냄새가 났고 바닥은 묻어 나오는 것 하나 없이 청결했다. 환기를 시킨다고 창문을 열어둔 탓에 초등학생들이 뛰어노는 소리와 새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물을 벌컥벌컥 따라 마셨다. 뼛속까지 차가운 물은 유난히 여유로움이 깃든 맛이었다.
당분간은 자유네.
마신 물이 손톱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다.
유리잔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 슬리퍼를 칙칙 끄는 소리만 귀에 울렸다. 온전하게 나 혼자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혼자 청결한 거실에 나와 있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젯밤 입사 확정 메일을 보내며 필요한 서류도 제출했다. 그리고 2주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인턴치곤 다소 건방진 요청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를 생각은 없었다.
이른바 카공족으로 출퇴근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뛰기도 하며. 매일 뭔가를 하고 있었지만, 다른 것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짓눌리고 있었다. 당장 출근하게 된다면 또 다른 걱정거리에 시달릴 터였다. 그래서 요청한 2주였다.
초등학생 하나가 야- 누구야!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와다다 하고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누군가를 부를 때 저렇게 목청껏 소리를 친다. 그만큼 반갑다는 걸까. 이번엔 꺄르륵거리며 웃어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삑삑대는 새소리와 아이들 소리가 퍽 어울리는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점심에 가까웠지만)
2주 뒤면 이 모든 게 뒤바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초등학생들의 수다를 느긋하게 엿듣는 일도, 이 고요한 거실도 특별해졌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더 격렬하게 하지 말자.
그 말이 무색하게 다음 날부터는 숨 가쁘게 바빴다. 며칠간 친구들과 여행을 갔고, 출근을 위해 옷과 신발을 조금 샀다. 그리고 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