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바닷물
어느 여름의 끝자락,
제법 선선해진 평범한 아침이었다.
어김없이 모자를 눌러쓴 채로 슬리퍼를 끌고 파스쿠찌를 갔다.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서니 에어컨 바람에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멍한 기분이었다. 괜히 머리가 시큰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재킷 주머니 속 USB의 차가운 금속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USB에는 어젯밤에 적어둔 발표 스크립트와 며칠간 준비한 PPT 파일이 담겨있었다. 오후에 있을 화상 프레젠테이션 면접용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잡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오늘은 또 어디에 이력서를 뿌려야 하나.
진짜 가고 싶은 회사에 지원해야지.
그런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 패기만 넘치던 때. 무한 긍정이 날 좋은 회사로 인도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때의 나는 꼼꼼하게 고르고 따진 회사에만 지원서를 보냈다.
서류탈락, 면접 불합격,
그리고 또다시 서류탈락.
부정만 당할 뿐 무한 긍정은 나를 어디로도 인도해주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답답했다. 수도권 대학에 꼼꼼히 채워 넣은 대외 활동들까지.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문과라서? 자기소개서가 별로라서?
나중에는 그 답을 찾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다고 해도 내 이력은 달라질 게 없다. 학점의 소수점 뒤 숫자 하나, 경험 한 줄조차 수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와서 고칠 수 있는 항목은 고작 자기소개서였다. 문장의 앞 뒤를 바꾸거나 있어 보이는 단어를 고르는 것. 그래서 내 이력서를 1초라도 더 오래 읽을 수 있도록.
그때의 나는 없고, 여기 열심히 묻지 마 지원을 하는 카페인 중독자가 있다. 면접으로 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취업준비생이. 누구보다 더 격렬하게 싼값에 나를 파는 중이다.
전단지에는 최대 50% 세일이라고 큼지막하게 박혀있지만, 눈길조차 안 가는 전단지 아르바이트생처럼.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며. 제출.
그렇게 내 폴더에는 비슷한 듯 다른 워드파일만 쌓이고 있다.
잡 포털 사이트를 닫고 다시 스크립트를 확인했다. 오후에 있을 면접은 괜찮은 외국계 기업이다. 3개월짜리 인턴 자리라는 것만 제외하곤.
하지만 바닷물이라도 마셔야 했다.
어제 본 화상 면접은 당일 바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