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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Aug 13. 2023

맨몸으로 헤엄칠 수밖에

06 개미

업무는 웹과 홈페이지에 관련된 일들이었다.

웹 디자인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주 이사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본사에서 주는 영문 자료가 많으니, 공부하면 직접 제작할 수 있다고 북돋아 주며.


주 이사가 필요한 건 웹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영어를 좀 하고, 디자인 도구도 조금 다루고, 글도 좀 써본 값싼 신입. 주 이사로서는 다 조금씩 할 줄 알았던 내가 이 자리에 적당했던 것이다. 웹 관련 영문 자료를 숙지하고, 글이나 사진을 다듬어 페이지를 제작하는 일을 하게 될 예정인 듯했다.


메일로 받은 링크를 타고 들어가 봤다. 여러 개의 강의가 죽 나열된 페이지는 그 양이 꽤 많아 보였다. 이걸 언제 다 듣지. 스크롤을 내리며 훑어보다 첫 번째 강의를 틀었다. 찬찬히 내용을 듣고 있자니 불길한 기운이 올라왔다. 첫날 들었던 두루뭉술한 강의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주 이사는 내가 이 페이지 제작에 익숙해질 때까지 당분간 다른 업무는 시키지 말라고 샴 차장에게 당부한 차였다. 즉 다른 일을 핑계 삼아 이 업무를 소홀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잡일이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번역이나 영수증 처리 같은.


그렇게 입사와 동시에 내내 그 강의들과 씨름했다.




이러다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3개월 지나가게 생겼네.


입사한 지 3주가 지났지만, 오늘도 이어폰을 끼고 강의를 듣는 나였다. 웹에 집중하라는 주 이사의 단호한 메일에 아직도 내게 떨어지는 업무가 없었다.


며칠 전에는 무작정 웹페이지를 제작해보려고도 했지만, 이리저리 클릭해 봐도 안 되는 것투성이다. 결국, 뭐라도 도움이 되는 게 있을까 싶어 다시 강의를 들어보는 중이었다. 쓸데없이 쾌활한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거슬렸다강의는 꽤 구체적이었지만 원하던 내용은 아니었다.


수박 겉핥기식의 이론 강의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 실전에는 턱없이 부족한 빈 깡통 같은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웹사이트가 비즈니스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추상적인 이야기.


당장 내가 필요한 건 페이지를 개설하는 방법이나 이 버튼이 클릭이 안 되는 이유였다. 내레이터의 말투는 친절했지만, 그 내용은 하나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틀어봤지만 역시나 도움이 되질 않았다. 강의를 끄고 물을 마시러 탕비실로 갔다. 파티션 사이로 바쁜 직원들을 보니 부러움이 밀려들었다. 차라리 저들처럼 바빴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오전의 탕비실은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티가 났다. 청결하고 조용했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들어봐야 하나. 놓친 구석이 있을 수도 있다. 물이 텀블러 스테인리스 표면으로 기다랗게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 하소연할 때도 없었다. 잘못 말했다가는 투정부리는 신입으로 첫인상이 박힐 터였다. 이건 마치 이등병에게 식칼 하나를 쥐여주곤 전쟁에 나가라는 식이었다. 고작 인턴한테 너무 큰 숙제를 내준 것 같은 생각에 주 이사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뭘 어쩌라는 건지.


비린 스테인리스 맛이 나는 물은 너무 차가웠다. 입천장이 얼얼할 정도였다. 주 이사는 당분간 다른 업무를 하지 말라며 퇴로를 막아두었으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길바닥의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사방의 돌로 길이 막혀버려 우왕좌왕하는 개미와 그걸 지켜보는 아이. 졸지에 개미 신세가 된 것 같아 속으로 픽 웃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강의를 틀었다. 파티션 너머를 슬쩍 보니 통화를 하는 샴 차장이 보였다. 웹에 대해 물어볼까 했지만 다급한 듯한 샴 차장의 목소리에 생각을 접었다. 반대편에는 오랜만에 사무실을 온 감 대리가 있었다. 조금 널널해 보이는 그에게 물어봐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그가 일어나길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다짜고짜 웹페이지에 대해 물어봤다.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하지만 그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웹페이지, 그거 골치 아프죠? 이해해요.


막막한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자기도 해보려 했지만 진작에 접고 이젠 다른 업무를 한다고. 대충 듣는 척하다 다른 걸 하면 된다고. 주 이사의 관심이 시들해질 테니 기다려 보라고 조언했다.


나만 골치 아픈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감 대리의 말이 조금 위안이 됐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갓 들어온 인턴 주제에 대충 듣는 척을 할 순 없었다. 융통성이 없는 나는 그런 편법을   몰랐다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고지식하게 정통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그 이론 강의는 접기로 했다. 그리고 무작정 웹페이지를 뜯어봤다. 권한으로 들어갈 수 있는 페이지는 다 들어가 보고, 되는 대로 눌러가며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건 이도 저도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맨몸으로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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