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랜들리 Aug 19. 2023

하이볼이라는 망할 변수

07 회식

목요일에는 팀 회식이 있었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5시,

우리는 회사 바로 뒤에 있는 곱창집을 갔다.


이른 시간이라 날은 밝았고 곱창집은 한산했다. 점심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자리였다. 술이 추가되었다는 것 외엔. 곱창을 좋아하느냐. 일은 좀 어떠냐. 그런 말들이 오갈 때쯤 테이블에 맥주 두 병과 소주 한 병이 놓였다.


점심이 공적이라면 저녁은 그보다 사적인 느낌이라, 자리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서로 알아가자는 식의 회식 자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웠지만, 조금 낯간지러웠다.


술과 저녁이 주는 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점심에 할 수 있는 대화와 저녁에 할 수 있는 대화가 다르다. 고작 몇 가지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완전히 달라지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술 몇 잔에 난데없이 나를 한 곂 벗겨 내고 싶어지고 마는 것. 급기야 깊은 우물 안에 있던 이야기를 퍼오기도 하며.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술이 주는 힘이 그렇게나 컸던가. 잘 마시지 못하는 편이라고 말은 해뒀지만 그래도 첫 회식이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뿌연 연기에 고기 냄새가 훅 올라왔다. 뜨거운 불판 앞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니 양 볼에 열기가 느껴졌다. 고기 누린내가 나는 곱창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래도 까탈스러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조심조심 입에 가져다 댔다.


오늘은 별로 안 먹네요?

곱창 별로 안 좋아해요?


몇 점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나를 보고 샴 차장이 물어봤다. 당황한 나는 좋아한다고 둘러댔다. 지난 몇 주간 본 샴 차장은 관찰력이 좋은 편이었다.


온화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살가웠지만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만큼 예리했다. 그래서 더욱 긴장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얘기가 오가고 사람들 얘기가 오갔다. 어느 부서에 누구랑 밥을 먹었는데 어떻더라. 이번 일은 이렇게 진행하는 게 좋겠다. 등의 주제로 이야깃거리는 계속해서 휙휙 변했다.


잔이 부딪치고 술과 고기가 번갈아가며 추가되었다. 감 대리는 하는 일들과 어떤 해프닝을 쉴 새 없이 말했는데 조금 허풍스러웠다.


저런 타입이구나.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잔에 입을 댔다. 그닥 재미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어색할수록 말하는 것보다 듣는 편이 편했다. 나는 웬만하면 눈, 입, 귀를 닫아야 하는 신입이었다.




2차로 근처 호프집을 가게 되었다. 이제 막 퇴근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곱창집을 나오니, 금세 어두워져 있었다. 이미 맥주 두 잔이나 마신 나는 호프집 메뉴판을 보며 또 맥주를 마셔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하이볼 마셔봤어요?


샴 차장이 물어봤다. 들어오며 술집 배너를 얼핏 보긴 했지만, 마셔본 적은 없었다. 너무 독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추천해 준 만큼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에 덜컥 시켜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 있자니 점원이 턱 하고 내 앞에 500cc짜리 맥주잔을 올려주었다. 투명한 빛을 띠고 있는 하이볼 잔 위에는 두껍게 썰린 레몬 슬라이스가 얼음 사이로 하나 박혀 있었고, 잔 바닥에는 노란색 액체가 깔려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옅은 위스키 맛이 나는 하이볼은 달짝지근하니 그야말로 황홀했다. 독하지 않은 걸 보니 도수가 높은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하이볼을 연거푸 몇 잔 비우고 필름이 끊겼다.




다음 날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을 뜨니 깜깜한 어느 공간이었다. 확실한 건 새로 이사한 집은 아니었다. 호텔인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무서웠다.


어둠에 익숙해지니 서서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스웨이드 재질의 보드라운 기역자 소파와 부엌,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현관이 보였다. 이를 어째. 호텔도 아닌 것 같다. 누구의 집인 듯했다.


도대체 어디야. 누가 첫 회식에 그렇게 마셔.

내가 미쳤지. 너무 크게 실수했다.


무작정 현관으로 보이는 문을 열고 나왔다. 삐리릭- 문이 열리자마자 급한 대로 쭉 걸어 나왔다. 그런데 택시도 안 다니는 숲 한가운데였다. 깜깜한 어둠 속 나무들만 가까스로 보일 뿐이었다.




숲 한가운데.


내가 왜 숲 한가운데 집에 있는 거지. 멍하니 나무를 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 화면은 5:00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핸드폰을 안 잃어버린 건 웃기는 일이었다. 배터리는 간당간당했지만.


우선 택시라도 불러봐야겠다는 생각에 택시 앱을 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프랜아!!! 어디가!


돌아보니 주 이사가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벙찐 채로 서로를 보았다.


여기는 주 이사의 집이었다.




주 이사를 따라 도로 집 안으로 돌아왔다. 어딜 가려했니. 여기 택시도 안 잡혀. 아휴 깜짝 놀랐다야. 무슨 일이니. 놀란 마음에 이런저런 말을 하던 주 이사는 우선 씻으라며 2층에 있는 화장실로 나를 안내했다.


원형으로 깎여있는 화장실벽에는 작은 터키색 타일이 알알이 박혀있었다. 특이하고 예뻤다. 역시 이사 집은 다르네.라고 생각하며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위에서 쏟아지니 머리가 더 시큰시큰했다. 긴장이 풀려버렸다. 우선 납치 같은 게 아니라 다행이었고 주 이사가 살갑게 말하는 걸 보니 큰 실수를 한 것 같진 않았다.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눅눅해진 옷을 도로 입었다.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에 눌어붙은 렌즈가 끈적거렸지만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어느새 동이 튼 금요일 아침. 이 와중에 출근은 해야 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출근 준비를 마친 주 이사가 냉장고 앞에 있었다.


갈배 사이다 마실래?


그렇게 우리는 냉장고에서 갈배 사이다를 한 잔 따 마시곤 출근을 했다. 내 생전 갈배 사이다가 그렇게 맛있던 적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근 몇 년간 그렇게 술을 진창 마신 적은 없었다.

이전 06화 맨몸으로 헤엄칠 수밖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