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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Aug 20. 2023

사무실 스펀지 밥으로 살아남기

08 공부

웹은 미지의 세계였고,

담당자는 내가 유일했다.


수만 가지 물음표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내 등을 채웠지만, 각자도생인 이곳에서 등을 긁어줄 사람은 없었다. 약간의 조언과 팁만으로 웹을 개척하고 퍼즐을 맞춰야만 했다.


모르는 거 있으면 글로벌 팀에 메일 보내봐.


주 이사의 조언에 매일같이 물음표를 모아 글로벌 팀에 보냈다. 그건 작은 따개비를 하나씩 떼어가는 지루한 과정이었다.


누군가 블랙리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냐며 농담을 할 정도로 그들을 못살게 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던져주는 작은 힌트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내고 우여곡절 끝에 웹에 조금씩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차츰 바빠지기 시작했다. 주 이사와 샴 차장이 시키는 업무를 번갈아가며 해치웠고 틈틈이 웹 공부를 하며 회사생활에 적응해 갔다.




몇 달간은 샴 차장과 테니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워드 파일이 메일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웹에 올릴 자료를 찾아 보내면 샴 차장이 확인하고, 또 글을 다듬어 보내면 샴 차장의 수정을 거쳤다. 나는 콘텐츠를 만드는 컨베이어 벨트가 되고, 샴 차장은 금속탐지기가 되어주었다.


열심히 글을 작성해 내도 그녀의 눈에는 반려대상이었다. 삑- 반려는 칼 같았지만, 워드 파일에 달린 알뜰살뜰한 수정 코멘트에는 온기가 담겨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틀린 부분을 짚어내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당근을 받는 날도, 채찍을 받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수정 코멘트를 하나씩 소화하며 탄탄하게 글 실력을 다져갔다.


몇 달간의 힘겨운 핑퐁 끝에 샴 차장의 빼곡한 설명으로 들어찬 워드 파일에 차츰 공백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은 수정 없이 바로 페이지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수정 안 올려도 될 정도네. 수고했어, 프랜이.


무림고수에게 인정을 받고 산에서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내가 터득했어!




샴 차장과의 업무 외에도 갖가지 업무가 메일을 통해 후두둑 떨어졌다. 그중 하나는 디자인 업무였다. 포토샵과 일러스트 그리고 영상 편집 도구를 조금씩 다룰 줄 아는 나는 면접에서도 이 부분을 어필했기에 주 이사는 간간이 디자인 업무를 시키곤 했다.


첫 업무는 호텔에서 진행한 워크숍 티셔츠 디자인이었다. 시안을 몇 개 추려 주 이사에게 보냈지만 가이드라인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곤 했다.


우리 톤이 아니야. 이건 너무 갔다.


내가 알던 디자인 공식은 '예쁘면 된다'였다. 하지만 회사의 브랜딩 공식은 따로 있었다. 이곳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따라야 할 브랜드 가이드라인이 있었고, 그 톤에 맞춰 디자인을 진행해야 했다. 그 내용도 상당해서 숙지하는데 꽤 시간을 들여야 했다.


디자인은 고작 예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디자인을 확정했다면, 주 이사는 여러 방면에서 디자인을 분석했다. 때로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때론 회사 입장에서.


뉴스레터 디자인부터 티셔츠, 배너, 컵 디자인. 심지어 로고까지.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없는 이곳에서의 디자인 스펙트럼은 광범위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브랜드 가이드라인에만 따르면 컵이든 티셔츠든 원하는 디자인을 뭐든 다 만들어볼 수 있었다. 내가 만든 디자인을 사람들이 입고, 쓰고, 호텔 벽에 세워지는 건 생각보다 뿌듯한 일이었다.


샴 차장이 알뜰살뜰 챙겨주는 식이었다면, 주 이사는 스스로 문제를 찾는 법을 알도록 했다. 모든 일이 그랬다.


방향만 살짝 가리키곤, 관망하는 듯한 주 이사의 방법은 추상적이라 답답하게 느껴졌다. 가끔은 서운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주 이사가 가리킨 방향 속에서 헤매다 어찌어찌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정답이나 실패도 온전히 내 책임이라 뼈저리게 깨닫고 후회하기도, 때로는 너무 각별해서 쉽게 잊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기민해졌고, 문제를 해결하는 근육이 조금씩 붙었다.


충고와 비난, 칭찬과 격려 사이에서 짜증 나고 속상했고, 뛸 듯이 기뻤다. 칭찬은 나를 춤추게 했고 비난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행사 준비로 온종일 붙어있을 때도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메뉴를 먹고 같은 고민을 할 때면 그 사실이 조금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둘과 보냈다.


기자를 준비했었다는 샴 차장에게는 콘텐츠를 만드는 법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웠고, 어린 나이에 능력만으로 임원직을 단 주 이사에게는 사내 정치와 브랜딩, 그리고 자립심을 배웠다.


우리 사이가 퍽 친해 보였는지, 누군가는 너네 이모. 너네 엄마가- 라며 주 이사와 샴 차장을 칭했다. 그렇게 오피스 엄마와 이모 틈바구니에서 스펀지처럼 닥치는 대로 먹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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