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랜들리 Aug 26. 2023

우주 속 먼지가 되어 잠수

09 퇴근

6:00


모니터 화면의 시계가 정확하게 여섯 시 정각으로 바뀌었다. 이 시간을 기다리곤 있었지만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유리창에는 내 뒤 직원이 입술에 립스틱을 칠하고는 순식간에 나가버리는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다. 곧 직원들이 연달아 퇴근할 것이다. 작업하던 업무 창을 닫고 시험 기출문제 파일을 켰다. 오늘은 부디 시간 내에 풀 수 있길 바라며, 핸드폰 속 타이머를 맞췄다.


6시는 신 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저 모니터 속 화면이 바뀌는 시간이었다. 회사 일에 몰두하다가도 정각이 되면 작업하던 창들을 끄고 자격증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프랜 씨, 퇴근 안 해요? 왜 야근이에요.

짐을 챙겨 나가려던 직원이 물어봤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악덕상사 때문에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불쌍한 인턴으로 보일까. 괜히 주 이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타이머를 멈추고 웃으며 대답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요.

준비하는 시험이 있어서요.


야근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퇴근 시간이 되면 다들 내 등을 떠밀어 퇴근하라고 말해주기 바빴다. 정규직이 아닌 인턴에게 야근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근은 정규직에나 해당되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언제나 건너지 못하는 선이었다.


인턴인 내가 야근을 하는 건 남아 있는 직원들에게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갓 들어온 인턴이 뭐 야근할 게 있다는 건지.라는 눈으로 나를 보는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자꾸 물어본다. 이젠 저 다정함이 조금 지겹던 차였다. 의아해하던 직원이 가고, 시험 시간을 재던 타이머를 다시 켰다.




시간은 7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직원들이 시켜 먹은 배달 음식 냄새가 사무실에 떠돌고 있어 거슬렸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여니 차가운 밤 공기와 함께 왁자지껄한 소리가 사무실을 채웠다.


텁텁한 사무실에 달짝지근한 밤 공기가 스며들어 숨쉬기가 편해졌다. 밤에는 항상 이런 그립고도 로맨틱한 냄새가 난다. 하루를 위로하듯이. 그런 싱거운 생각을 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 시험은 타임어택이라 시간 안에 완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빠르게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문제 하나를 마친 후, 그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그다음은?


시험이 끝난 다음엔 뭘 해야 할까.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그다음이라는 생각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회사 업무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근데 또 가끔은 다 그만둬버리고 싶은 마음이 튀어 올랐다. 열심히 업무를 하다가도 문득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 김이 빠져버렸다. 달려도 항상 제자리라는 기분에 목구멍이 뜨끈했다.


고작 인턴이면서, 뭘 그렇게 악착같이.

가로등 불빛에 뛰어드는 나방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달려들어야 할 건, 앞으로의 난데. 정규직 보장이 안 되는 회사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야근을 걱정해 주는 회사 사람들조차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내 일을 해결해 줄 것도 아닌데.


어차피 1년 뒤에는 안 볼 사람들인데.

당신들은 정규직이기라도 한데.




띠디딕 -

핸드폰 속 타이머가 짧게 울렸다.

결국 미완성이었다. 타이머가 울렸으니 완성을 하는 건 의미가 없어졌다. 더 연습이 필요했다.


남아있던 직원들도 전부 퇴근을 했는지 사무실이 휑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니 가벼운 현기증이 돌았다. 유리문 쪽으로 걸어가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전부 탁탁 껐다. 예전부터 형광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도 싫고, 차가울 만큼 흰빛이 눈을 찌르는 것도 싫다.


내 모니터에만 음산하게 빛이 들어왔다. 어둡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하다. 회식하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차 클렉션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이렇게 불을 끄면 우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보잘것없는 우주 속 먼지. 내가 물 한 방울이 되어, 바닷속으로 섞여 들어간 듯한. 나는 이곳에 있지만, 그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이 왈칵 들었다. 당장에라도 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실제로 번잡스럽게 울 마음은 없었지만. 형광등에는 보이지 않던 기분이 불을 끄니 이렇게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창 밖에 보이는 조명에 의지하여, 자리로 돌아와 타이머를 맞췄다.


한 번만 더 하고 가자. 집에.

이전 08화 사무실 스펀지 밥으로 살아남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