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이
완연한 봄, 입사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새파란 하늘에는 벚꽃 잎이 어지럽게 날렸고, 공기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날은 보란 듯이 풀려가는 데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서명을 하고 나오기까지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주 이사가 내민 종이는 구김 한 점 없이 반듯하고 새하얘서 위화감이 들었다. 인턴 연장 계약서에 서명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계약 땐 순수하게 기뻤던 것도 같은데. 서명란에 빠르게 이름을 채우곤 주 이사 방을 빠져나왔다.
처음 계약서에 서명할 땐, 열심히 한 덕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노력해서 연장할 수 있게 된 거라고. 값싼 인턴을 가능한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이 회사에 이득이라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이 못마땅했지만, 달리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장 계약은 베일 것 같이 차갑고 무미건조하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미적대던 오후는 평범했다. 인사팀의 공지 메일을 한통 받기 전까진.
그건 내가 아는 인턴 동기의 정규직 전환 소식이었다. 오전에 내가 인턴 계약을 연장하는 동안, 누군가는 정규직 전환이 되었다. 이건 좀 가혹하네.
그와는 입사 첫날, 유리문 앞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다. 꽤 큰 체격에, 어려 보이지만은 않은 인상 탓에 직원인 줄 알았지만 뻘쭘하게 서성이는 모습을 보고 나와 같은 입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과생에 엔지니어였던 그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지만, 입사 동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적 친밀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지 않을뿐더러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우연히 마주칠 때면 괜스러운 반가움을 감당하지 못해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공지 메일 안에 박힌 그의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점의 실패도 없었다는 듯한 당당한 얼굴이다. 메일을 죽 내려보니 정규직 전환 공지 외에도 몇몇 엔지니어의 신규 입사 소식이 있었다.
엔지니어 자리는 언제나 전환이 잘 돼.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떠올랐다. 나도 엔지니어였으면 전환이 되었을까. 축하해줘야 하는데, 배신감이 드는 건 왜일까.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소리와 누군가 작게 전화를 하는 소리만 사무실을 평화롭게 채우고 있었다. 해가 높게 떠있는 오후는 꽤 후덥지근해져서, 등 뒤로 티셔츠가 붙는 기분이었다.
여름이 순식간에 올 듯하다. 시간은 이렇게나 빠르다. 그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길을 개척해 가고 또 누군가는 채용되는데, 나는 이 사무실에 언제까지나 고여있을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스크롤을 내리며 메일 속 신규 입사자들의 사진을 가만히 보다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자바 칩이 잔뜩 들어간 스타벅스 프라푸치노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차갑고 달콤한.
이후 몇 달간은 그런 생각할 틈조차 없게 일이 몰려들었다. 큰 행사를 앞두고 우리 팀 전체가 바빴던 터라 덩달아 정신없는 나날들이었다.
프랜아, 이거 인터뷰 좀 다듬어줄래?
자리에서 김밥으로 대충 점심을 때운 샴 차장이 물어봤다. 인터뷰 글을 다듬어 포스팅을 올리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던 업무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 흔쾌히 하겠다고 나섰지만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그 친구의 인터뷰였던 것이다. 제목은 <인턴에서 정규직이 되기까지, 취업 성공 스토리>였다.
쉽지 않다. 10분째 워드 파일을 켜지 못한 채 대치 중이었다. 다른 일을 핑계 삼다가 결국 20분이 지나서야 파일을 열어볼 수 있었다.
워드 파일에는 그가 취업 준비를 하던 때부터 인턴 생활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간간이 축구 동호회에서 찍은 사진이나 매일 지키려고 했다는 생활 계획표 사진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미래 입사자들에게 남긴 친절한 조언까지.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그였다.
아침 6시 기상, 성실하게. 열심히. 꾸준히.
모니터 속 활자들이 살아나 나를 콕콕 찔려댔다. 넌 도대체 뭘 했니.
정규직이 되려면 저렇게 해야 하는 거였나 보네.
같은 입사 동기로 들어와 그가 남긴 조언을 되새기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는데 어느새 수긍하고 있는 나였다.
글마다 기본 서너 번을 퇴고하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더 이상 퇴고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 번의 퇴고를 마치고 그대로 포스팅을 올려버렸다.
계약직 사원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같은 층에서 근무하던 또래도 있었다. 2년의 계약기간을 채우고 나간다는 그녀와는 오며 가며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하던 사이였다.
퇴근 시간이 다 된 무렵, 그녀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며 부서별로 다니며 인사를 건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느냐는 둥, 이제 못 봐서 어떡하느냐는 둥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직원들이었다.
어쩜 다들 저렇게 능숙하게.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계약이 만료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다. 떠나는 그녀조차 그 사실을 모르는 듯, 다들 밝고 기뻐 보인다.
우리 팀 쪽으로 인사를 하러 왔을 때는 샴 차장과 감 대리가 먼저 일어나 그녀에게 살갑게 인사를 했다. 어정쩡하게 일어선 나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흘끗거렸다. 한마디라도 해야 하나. 어쩌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미 옆 부서로 떠난 그녀였다. 그래도 어찌 보면 동긴데. 그 친구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한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퇴근하다 문득 알게 되었다.
미래의 내 모습 같아서.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눈 깜짝할 새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결국 원점으로, 취업준비생으로 돌아가는 내 모습.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웃으며 돌아가, 다음 날 파스쿠찌 같은 데서 잡 포털 사이트를 뒤지고 있을 내 모습 같아서.
나는 속이 좁은 사람이라, 비위 좋게 웃으며 인사하러 다니진 못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