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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Sep 03. 2023

하마터면 달달할 뻔했다

12 상상

밤 공기마저 끈적할 정도로 더운 저녁,

사무실에서 남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자격증 시험은 마쳤지만, 야근을 끊을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해야 했다.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곳에서의 경험을 남김없이 활용할 생각이었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넘쳐났다. 집에 돌아가면 밀린 빨래를 돌려야 했고, 똑 떨어져 버린 샴푸를 사야 했다. 저녁은 편의점 샌드위치로 때울 생각이었다. 머릿속으로 할 일을 세다가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작업하던 업무 파일을 닫고 포트폴리오를 열었다.


스크롤을 내리며 죽 보던 차에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좀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프랜아, 오늘도 야근이야?


옅은 진심이 담긴 문자. 이런 문자를 받으면 마음이 취약해진다. 여름 한낮 테이블 위에 무방비하게 나와 있는 케이크처럼.


청결하게 생긴 착한 남자애였다. 그 곧은 인상이 좋아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밀당이니 뭐니 하는 것 없이도 챙겨주는 말을 곧잘 하는 애였다. 그 면이 또래 남자애들 같지 않아 신기했다.


메시지 창 속 커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우리 둘 중 누군가는 진심을, 간지러운 말들을 하고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났다. 답장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그만 내려놨다.


달콤한 안일함에 속아 연애를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취업 준비생으로 돌아갈 순진한 내가 그려졌다. 파노라마처럼.




괜한 잡생각에 몇 분째 파일 하나를 못 찾고 있었다. 이 폴더 저 폴더를 클릭해 보다 포기하고 엉켜있는 파일을 정리했다. 아직 답장은 하지 못한 찜찜한 상황이었다.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떨까.


물론 즐겁겠지. 몇 달간은 출근길이 반짝이고, 퇴근 시간이 기다려질 것이다. 여섯 시가 되면 꼼꼼하게 화장을 수정하고 그를 만나러 간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즐거웠던 일부터 짜증 났던 일까지 전부 늘어놓다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다음 날 출근을 한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서로가 숨 쉬듯이 편해지고, 서서히 당연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은 인턴 생활이 불안해지고, 불현듯 적다만 자기소개서가 생각나리라. 그게 내 기분을 흩트려버리고, 망가진 기분으로 그에게 모진 말을 하고 상처를 준다. 착한 그는 몇 번은 참아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참다못한 그가 내게 한마디를 하고, 그게 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서운해져 버리는 것.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런 진부한 말을 할 수도. 그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길바닥에서 언성을 높이며 헤어져 버리는 클리셰.


지금의 몽글한 기분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남아서는. 시간은 낭비하고 추억만 가득한 채로.


그와의 만남으로 그간을 채워버린 나는 이래저래 힘들었다는 핑계들을 대며 뒤늦게 취업을 준비한다. 하지만 시기를 놓쳐버렸다는 걸 깨닫고 결혼이나 하겠다며 태평한 결심을 한다. 그다음은 선이나 보러 다니는 모습. 거기까지 상상을 하니 기분이 끔찍해졌다. 어처구니가 없다.


누군가 열어둔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밤 공기가 들어왔다. 와악- 하는 소리에 창 밖을 내려다봤다.


흰색, 파란색의 반소매 와이셔츠를 입은 아저씨들이 요리주점에서 막 나온 듯했다. 고층 사무실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시끄러운 걸 보니 얼큰하게 취한 듯하다. 슬슬 가야 할 텐데.


포트폴리오를 끝내버리라 마음먹었지만,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했다. 파일을 열지도, 닫지도 못한 채 발이 묶여 버렸다. 미적거리며 괜히 파일을 클릭해 보다가 사무실을 나왔다.




끈적하고 무더운 밤. 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간간이 밤 내음이 났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을 빼곡하게 채운 빨간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이 요란스럽게 깔려있다. 음식이 튀겨지는 냄새와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밤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알렸다.


매캐한 숮과 기름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어 식욕이 돌았다. 풍족함이 깃든 냄새. 짧은 감상평을 내린 나는 건너편 길목에서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슥슥 걸어가는 중이었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아득하게 먼 사람들이다. 핸드폰으로 고개를 내렸다. 이젠 답장을 해야 할 시간이다.  


응. 이제 퇴근.


고민을 하다 결국 그렇게 보냈다. 보내느니만 못한 단물 빠져버린 답장을.


욕심 많은 나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 따듯한 말도, 시간도, 여유도. 몇 번 더 카톡이 오는 걸 애써 읽지 않고 연락을 끊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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