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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Sep 08. 2023

회사 빌런을 소화하는 방법

13 고구마

이거 나뭇잎

하나 달아줘.

좀 귀엽게.

알지?


모니터 하단으로 깜빡깜빡 사내 메신저 창이 떴다가 하나씩 사라졌다. 또 그놈의 아이콘 얘길 테지. 조금 늦게 답장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메시지 창을 읽지 않은 채로 두었다. 저 아이콘 수정은 오늘 안에 안 끝날 것이다.


고작 웹페이지 한구석에 들어가는 작은 아이콘은 여섯 번째 수정을 거쳤다. 대체 이게 뭐라고. 그녀와의 일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타 사업부의 차장인 그녀는 요즘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있다. 메일을 쓰기 귀찮다는 이유로 사내 메신저를 애용하는 그녀 덕에 내 모니터 화면은 쉴 틈이 없었다. 


샴 차장에게 말해보기도 했지만, 그저 나를 몇 번 토닥여주고 앞으로 계속 볼 텐데 잘 지내보란 말로 좋게 타이를 뿐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네가 이해해.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야.


억울한 상황을 토로해도 대신 화살을 맞아줄 사람도, 쏘아줄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맞으면 맞는 대로 지냈다. 내 딴에는 그녀를 골려줄 생각으로 얕은 수작을 써보기도 했지만, 되려 불같이 나오는 탓에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고, 우리 사이의 긴장감만 팽팽해졌다.


항상 큰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그녀. 그 아래 있는 작은 코는 안경 때문에 버거워 보였다. 푹 내려간 안경 사이로 내려다보는 시선. 그 얼굴을 후려치는 상상을 해봤다. 그럼 왈칵 울려나 아니면 꼿꼿한 채로 나를 째려볼까. 안경은 바닥에 떨어졌고, 나는 그 안경을 밟는다. 와그작- 상큼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런 상상을 하는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사내 메신저로 격한 말이 오가기도 했다. 한껏 털을 세우고 불만을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나대로 억울했던지라 쌀쌀맞게 대답을 했다. 주 이사가 시킨 업무를 했을 뿐이라고. 내겐 그럴 권한이 없다고.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한 가지 얘기해 줄게요.

주 이사는 프랜 씨의 상사지, 내 상사가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 봐도 얄미운 답장이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그간의 경험상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도 인턴 주제에 사근사근하게 굴지 않는 내가 싫었으리라. 작은 아이콘 하나를 못 바꿔 안달이 난 게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든 인정을 바라는 거라고.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보나 마나 그녀일 것이다. 받아달라고 아우성치는 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뒀다. 바빴다고 하면 별 수 없을 테지. 드글드글 끓는 기분에 고개를 의자 뒤로 푹 젖혔다.


회사 빌런에게 한방 먹였다거나 상사와 대판 싸웠다는 이야기는 다 어딜 간 걸까. 인터넷에서 본 사이다는 없고, 현실은 팍팍하기 짝이 없는 고구마뿐이다.




목 빠져라 기다린 주말이었지만, 색다른 건 없었다.


점심쯤 일어나 밀린 빨래를 했고, 집 앞 샐러드 집에서 점심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근처 카페에서 넷플릭스를 뒤지는 중이었다. 통창으로 햇살이 그대로 들어왔지만 냉방이 너무 잘 도는 탓에 추웠다.


얼음이 녹아 옅은 맛이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창 밖으로 지나가는 흰 강아지, 후줄근하지만 편한 옷차림. 아무것도 아닌 이 따분함이 그리웠다. 고작 고민한다는 건 넷플릭스 뭐 볼까 라든가. 에어컨 온도를 올려달라고 할까 하는 것들이다.


그만둘까.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있는 것도, 회사 생활이 쉬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그만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그녀가 생각났다. 미팅룸 의자에 푹 기대앉아 나를 내리깔며 보는 시선. 턱을 든 모양새로 지시하는 말투. 그리고 노트북에 고정된 내 시선. 어찌 됐든 그런 건 겪지 않아도 된다고.


홧김에 그만둔다는 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놀라는 중이었다. 퇴사가 답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어딜 가나 이런 사람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진부하지 않나. 고민하다가 좀비물을 보기로 했다.




딱 달라붙는 타이츠를 입은 여자와 괴상한 모자를 쓴 남자가 눈앞의 좀비들에게 열심히 칼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먼지와 땀에 얼룩덜룩한 얼굴로. 주위로는 좀비들이 크으으-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중에도 남자가 여자에게 농담을 건넨다. ‘오늘 저녁 먹긴 글렀네’와 같은 심심한 미국식 농담을. 여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보곤, 무섭게 달려오는 좀비 머리에 칼을 내리꽂는다. 푹-


저런 와중에 농담이라니. 하긴. 저 정도는 돼야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생각해 보면 생사를 넘나드는 문제는 아닌데. 고작 그녀가 싫은 것뿐인데.


싫은 사람. 그건 숨 쉬듯이 당연한 일이다. 그녀를 안 보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비슷하고 다른 그녀들을 만날 것이다. 지금 피하더라도 반드시 맞닥뜨리게 된다.


그간을 회피해 온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리라. 좀비에게 잡혀먹히는 유약한 엑스트라처럼. 그러니 그만둔다는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싫은 사람 때문에 이력서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칼을 휘두르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마체테를 휘두르진 못해도 링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겠다고. 당신을 소화해 낼 때까지는 잡혀먹히지 않으리라. 남자와 여자는 그 많던 좀비들을 무찌르고 유유히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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