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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Sep 09. 2023

산산조각이 난 그날 밤

14 유리

아홉 시 오 분 전. 지하철역 횡단보도 앞.

신호가 떨어졌다.


뛰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 몇 분 늦었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따라 출근하는 사람들의 까만 뒤통수가 보인다. 비슷하게 다른 머리들이 같은 방향으로 유유히 움직인다. 오 분 전인데 어디 하나 뛰는 사람이 없다. 다들 나랑 비슷한 생각인 건가. 


매일 쓴 약을 달여 마시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꿀꺽 삼켜버리면 될 일인데, 매번 싫은 것처럼. 


어릴 때 꿈은 회사원이 아니었다. 고작 출퇴근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좀 더 재미있는 일을 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이렇게 인턴이 되었다. 회사원이 되고 싶은 인턴.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어느 가사가 생각나 조금 우스워졌다. 오랜만에 그 노래나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에어팟을 꺼냈다.




프랜, 잠깐 이리 와볼래?

프랜, 이거  이러지?


이번엔 정확하게 2분이었다. 샴 차장이 나를 다시 부르는 데 걸린 시간이.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메일이 안 켜지는 사소한 문제부터 각종 일로 부르는 통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놈의 프랜.


배 언저리에서 찰랑거리던 짜증이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꼬박꼬박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짜증이 새어 나올세라 조심하며, 위험천만하게.


하루하루가 유리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평범한 아침, 내 이름을 부르는 샴 차장의 목소리에 모든 게 지겨워졌다. 못해 먹겠네.


장문의 문자를 남기기로 했다. 온갖 말들이 메시지창에 빼곡하게 채워졌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죄송스럽다는 구구절절한 말, 마음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로 마음 상하는 말들그리고 돌아가는 길 편히 가시라는 가식적인 말까지.


하려는 말은 적당히 부르라는 한 마디지만. 어쨌든 전송. 쿠션 사이에 돌을 숨겨 던졌다.


답변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이런 말을 해주어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조심하겠다는 말. 문자는 샴 차장다웠다.


완벽한 악역이 된 기분이었다. 혹은 머릿속이 꽃밭인 MZ. 이를 건네 들은 친구의 반응은 이랬다.


, 어떤 회사에서 인턴이 차장한테 그런 카톡을 보내냐. 외국계라더니 수평적이네. 너네 차장도  같은 인턴 때문에 고생이다 ㅋㅋㅋ


후덥지근한 퇴근길, 습한 날씨에 머리카락이 귀 옆으로 달라붙었다. 갈증이 났다.


결국 편의점 와인을 사 들고 집에 왔다. 오자마자 찬장에 있는 싸구려 잔과 와인오프너를 꺼내 코르크를 뽑아냈다. 짭짤한 알코올 냄새. 병 입구를 기울이니 붉은 와인이 꿀럭거리며 잔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알싸하게 퍼졌다. 쨍하고 시큼하다. 목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싱크대 앞에 선 채로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워내곤, 다시 한 잔을 가득 부었다. 오늘은 와인 파티다.




멍한 기분이었다. 뇌 주름마다 와인이 들어차 생각이 더뎌졌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버린 꼴이었다. 잘난 예민함 때문에 샴 차장한테 신경질을 낸 것이다. 완전 하극상이네. 그래도 문자를 보낸 건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은 다 이기적이다. 그런 생각들이 이리저리 휘몰아치다 기분이 홱하고 좋아져 버렸다.


와인잔에 술이 없었다. 더 마셔야지. 벌떡 일어나다 중심을 못 잡고 넘어져 버렸다. 빈 와인잔이 바닥으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푹-


발바닥에 큼지막한 와인잔 조각 하나가 들어가 버렸다.


술에 취한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 손가락으로 발바닥에 박힌 와인잔 조각을 빼냈다. 후두둑하고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너무 아픈 나머지, 억-하는 소리가 났다.


삼각형 모양의 검지만 한 유리 조각이 피에 절여져 있었고, 그걸 든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되게 아프구나.


까치발로 걸어가 약상자를 열어봤지만, 작은 밴드 몇 개만 굴러다닐 뿐이었다. 이걸로는 턱도 없다. 맨발로 다니는 곳마다 피가 뚝뚝 뭉텅이 채 고였고 빨간 발자국이 남았다.


깨진 유리잔과 검붉은 웅덩이,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바닥. 누가 보면 살인 현장인 줄 알겠네. 주변에 노란 테이프라도 둘러야 할 것 같은 웃픈 장관이었다.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내 발바닥을 누르곤, 이사할 때 쓰던 박스 테이프로 감아버렸다.


벌 받나 봐. 액땜했다.


휴지 사이로 피가 새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진통제를 찾아볼까 했지만 이미 힘이 다 빠져 버린 나는 그대로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절뚝거리며 회사로 출근했다. 발에는 착착- 박스테이프 소리를 내며.


(나중 이야기지만,  사건을 들은  이사는  무식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내게 깨지지 않는 캠핑용 스테인리스 와인잔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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