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도망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날,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인천의 어느 호텔 앞이었다.
파주 집에서 주말을 보냈지만, 모처럼 휴가를 내고 온 호텔이었다.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이 훅 불어 귀가 먹먹했다.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아프던 참이라 끈끈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주중 아침의 호텔은 한적했다. 재킷에 금박 이름표를 꼽은 사람들과 벨보이들만 로비를 여유롭게 오갈 뿐이었다.
이곳은 예전에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러 종종 온 호텔이다. 낯익은 장소, 낯선 기분. 그때는 흐릿해 보였던 바다색이 지금은 파란 물감을 뿌린 듯 선명하다. 몰래 땡땡이라도 치는 듯한 느낌에 왠지 들떴다.
체크인을 하기에는 시간이 일러 로비 안쪽에 있는 카페에 있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달짝지근하고 따끈한 빵과 에어컨 냄새가 묘하게 어우러졌다.
도망가자. 이곳에 오게 된 건 지난주 어느 밤의 충동이었다.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강렬한 충동이었다. 급기야 호텔 룸 예약부터 결제까지 마친 이상한 밤. 어찌 됐든 그런 것치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내내 벼르고 있던 책을 읽을 생각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창문 너머 바다를 보니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책을 덮고 테이블 앞에 놓인 두툼한 크루아상을 썰어내는 데 집중했다.
며칠 전 회사 근처에서 술을 마시며 샴 차장은 그런 얘기를 했다. 그런 문자를 받아 속상했다고. 앞으로 불편한 건 말해줬으면 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사뭇 조심스럽게, 또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샴 차장은 내게 말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 관계 같은 건 어렵다. 특히 나처럼 무심한 사람에게는. 이리저리 얽힌 폭탄 선을 잘라내듯이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선을 잘못 건드렸다간 펑하고 터져버리고 만다.
바다가 눈앞에 있다. 만지면 손이 젖고 짠내가 남는 진짜 바다가. 해변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부터 그 위로 고요하게 움직이는 구름까지. 픽셀 하나라도 놓칠세라 찬찬히 눈에 담았다.
이런 바다가 있는 곳에서 혼자 살면 어떨까. 그럼 관계 같은 거 신경 쓸 일도 없을 텐데. 하루이틀이면 몰라도 아무래도 외롭겠지. 그런 싱거운 생각을 하고 있자니 체크인 시간이었다.
한숨 잔 탓에 기분은 조금 몽롱했다. 수영복에 대충 겉옷을 걸친 차림으로 유리문을 밀었다.
수영장이다.
살갗에 닿는 습한 공기는 부드러웠고, 그리운 수영장 냄새가 났다. 기분 낼 겸 선글라스도 챙겨봤지만, 곧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이 어스름한 탓에 쓸 일은 없었다.
어릴 때 수영장을 자주 다녔다. 깡 마르기만 하고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나에게 엄마는 뭐라도 시켜야 했는지 발레부터 태권도, 수영까지 각종 운동을 시켰다. 약골 소리를 들을 만큼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그래도 수영만큼은 자신 있었다.
운동은 싫다고 매번 툴툴거리는 나였지만 수영은 군소리 없이 잘 다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했다. 눈 주위에는 항상 판다처럼 물안경 자국이 남아있었고, 머리카락은 수영장 물을 먹어 빳빳했다. 지금도 내가 접영을 할 줄 안다고 하면 다들 놀래는 눈치다. 비실거리는 니가?
잠을 깨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맥주를 시켰다. 생각보다 수영장은 한적한 편이었다. 구석에는 커플 한 쌍이 수영장 가장자리에 팔을 걸친 채였고, 몇 명이 기분 좋게 유영하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이 치는 게 꽤 감미로워 보였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시각, 물 표면이 오렌지색으로 옅게 물들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잠을 덜 깬 것처럼 몽롱했다. 비현실적이다. 별안간 그런 생각을 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저 유영하는 외국인도, 그 손에 따라 흩어지는 물결 모양도, 플라스틱 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반들반들하게 차가운 느낌도.
그날 밤 홧김에 호텔 예약을 안 했더라면, 지금쯤 내 시선 끝에는 수영장 대신 컴퓨터 모니터가, 맥주 대신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겠지. 선베드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존재하지도 않는 내가 불쌍해졌다. 성실하게 출근을 한 내가.
맥주는 물처럼 들어갔다. 옅은 수박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남은 맥주를 비우고 겉옷을 가방에 대충 쑤셔 넣었다. 수영장 안 계단 가장자리에 발을 담가봤다. 따듯한 물이 발목을 감싸는 느낌이 좋았다.
음주 수영이네. 나쁜 짓을 하는 듯한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찬찬히 담갔다. 잠기는 만큼 기분은 그 위 언저리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