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발악
확실히 외국계는 한국 회사보다 신입사원을 자주 뽑지 않는다. 회사 사람들만 해도 대부분 차 부장급의 경력직이고 내 또래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계가 수평적인 조직 문화라는 건, 어쩌면 신입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외국계 회사가 경력직을 선호하는 이유는 언제 철수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과 본 국가에서 정치적인 문제라도 생기면 사업장을 접어야 하므로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는 신입보다 바로 업무를 해낼 수 있는 경력직을 뽑는다고 한다.
자리를 하나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결원이 생겨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를 뽑는 건 쉽지만, 기존의 팀 인원에서 머릿수 하나를 늘리는 것. 즉 헤드 카운트(Head Count)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주워들은 바로는 끝없는 결제 라인과 설득, 그리고 모든 윗선 사람의 100% 동의 끝에 한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내 경우에는 주 이사가 그 번거로운 일을 처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즉 주 이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는 인턴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치도 않지만, 그래도 이 귀여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발악은 해볼 수 있지 않은가.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다.
압박
주 이사에게 직접적으로 정규직에 대해 말하는 건 부담이 있었다. 되려 반감을 살 일이었다. 정규직을 보장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적어도 내 불안을 주 이사가 알고, 같이 초조해하길 바랐다. 나와 똑같이. 내가 정규직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면, 주 이사는 내가 언제 나갈지 모르는 인턴이라는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언제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인턴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 사람 좋은 샴 차장에게 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마음이 여리고 공감을 잘하는 샴 차장에게 나는 비에 젖은 강아지 행세를 했다. 내 초조한 심경과 함께, 타 회사에 지원 중이라는 말이 주 이사의 귀에 들어가길 바라며.
그렇게 점심에 떡볶이집에서, 야근 후 흑맥주 집에서. 틈날 때마다 조언을 핑계 삼아, 내 이야기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내가 신기했던지 다소 당황하는 샴 차장이었지만 이내 수긍을 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강아지의 신세는 생각보다 효과적으로 주 이사에게 전달되었다.
입지
이곳에 없어서는 안 될 이유를 하나씩 만들었다. 그게 보여주기 식이라도 상관없었다. 가랑비 젖듯이 조금씩, 은연중이라도 내 손을 타고 있는 일이 많다는 걸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테면 나를 홍보팀의 창구로 만드는 일. 한동안은 여러 직원과 밥 약속을 잡았다. 벽을 허물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팀과 관련된 것들을 내게 문의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의를 해결하고 주 이사에게 보고하는 식이었다. 또 그 과정에서 내 손을 거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야금야금 만들어냈다.
업무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글로벌 사이트를 뒤져가며 더 효율적인 방법과 접목할 수 있는 기능들을 찾아내, 주 이사에게 보여주었다. 칭찬이라도 받는 날엔 그냥 운 좋게 찾아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굴며.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운은 단 한 줄도 없었지만)
활용
정 안 되면 이직해야 했다. 취업 준비생이자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로선, 이 회사의 메리트를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인사팀이었다.
실제 면접을 보고 이력서를 골라내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잘 봐줄 수 있지 않은가. 그중 내 이력서를 성심성의껏 살펴줄 사람을 골랐다.
인사팀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홍보팀에서도 카메라 앞에 누군가를 세울 일이 있으면 손쉽게 그를 뽑곤 했다. 모두에게 친절하다는 평판을 지니고 있는 그가 내 이력서를 거부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가 인사팀의 의무감으로 사생활을 보호해 준답시고, 입을 닫아버리면 아쉬울 일이었다. 그래서 보험 하나가 필요했다. 내가 이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널리 퍼뜨려 주 이사의 방 앞까지 그 소리가 들리게 해 줄 사람.
골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감 대리. 빅 마우스일 뿐 아니라 콧대 높은 사람이었다. 당신만이 가지고 있는 ‘프로페셔널함’이 필요하다는 약간의 아부와 함께 이력서를 전달했다.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이력서에는 둘의 구체적인 피드백 내용이 담겨왔다. 나는 피드백대로 이력서를 수정했고, 이사님도 낌새를 알아차린 듯했다. 어디 지원해?라는 주 이사의 퉁명스러운 질문을 듣고 나는 만족하고 말았다. 감 대리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하고 있다.
그 틈을 타, 면접 조언을 구하는 건 덤이었다. 몇 가지 조언을 주고는 우스갯소리로 ‘잘 보고 오지 마라’라고 하는 주 이사였다.
이젠 정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