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랜들리 Sep 17. 2023

오르지 못해도 손은 뻗어볼래

16 발악

확실히 외국계는 한국 회사보다 신입사원을 자주 뽑지 않는다. 회사 사람들만 해도 대부분 차 부장급의 경력직이고 내 또래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계가 수평적인 조직 문화라는 건, 어쩌면 신입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외국계 회사가 경력직을 선호하는 이유는 언제 철수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과 본 국가에서 정치적인 문제라도 생기면 사업장을 접어야 하므로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는 신입보다 바로 업무를 해낼 수 있는 경력직을 뽑는다고 한다.


자리를 하나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결원이 생겨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를 뽑는 건 쉽지만, 기존의 팀 인원에서 머릿수 하나를 늘리는 것. 즉 헤드 카운트(Head Count)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주워들은 바로는 끝없는 결제 라인과 설득, 그리고 모든 윗선 사람의 100% 동의 끝에 한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내 경우에는 주 이사가 그 번거로운 일을 처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즉 주 이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는 인턴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치도 않지만, 그래도 이 귀여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발악은 해볼 수 있지 않은가. 더 이상의 여유가 없었다.




압박

주 이사에게 직접적으로 정규직에 대해 말하는 건 부담이 있었다. 되려 반감을 살 일이었다. 정규직을 보장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적어도 내 불안을 주 이사가 알고, 같이 초조해하길 바랐다. 나와 똑같이. 내가 정규직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면, 주 이사는 내가 언제 나갈지 모르는 인턴이라는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언제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인턴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 사람 좋은 샴 차장에게 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마음이 여리고 공감을 잘하는 샴 차장에게 나는 비에 젖은 강아지 행세를 했다. 내 초조한 심경과 함께, 타 회사에 지원 중이라는 말이 주 이사의 귀에 들어가길 바라며.


그렇게 점심에 떡볶이집에서, 야근 후 흑맥주 집에서. 틈날 때마다 조언을 핑계 삼아, 내 이야기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내가 신기했던지 다소 당황하는 샴 차장이었지만 이내 수긍을 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강아지의 신세는 생각보다 효과적으로 주 이사에게 전달되었다.


입지

이곳에 없어서는 안 될 이유를 하나씩 만들었다. 그게 보여주기 식이라도 상관없었다. 가랑비 젖듯이 조금씩, 은연중이라도 내 손을 타고 있는 일이 많다는 걸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테면 나를 홍보팀의 창구로 만드는 일. 한동안은 여러 직원과 밥 약속을 잡았다. 벽을 허물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팀과 관련된 것들을 내게 문의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의를 해결하고 주 이사에게 보고하는 식이었다. 또 그 과정에서 내 손을 거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야금야금 만들어냈다.


업무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글로벌 사이트를 뒤져가며 더 효율적인 방법과 접목할 수 있는 기능들을 찾아내, 주 이사에게 보여주었다. 칭찬이라도 받는 날엔 그냥 운 좋게 찾아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굴며.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운은 단 한 줄도 없었지만)


활용

정 안 되면 이직해야 했다. 취업 준비생이자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로선, 이 회사의 메리트를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인사팀이었다.


실제 면접을 보고 이력서를 골라내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잘 봐줄 수 있지 않은가. 그중 내 이력서를 성심성의껏 살펴줄 사람을 골랐다.


인사팀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홍보팀에서도 카메라 앞에 누군가를 세울 일이 있으면 손쉽게 그를 뽑곤 했다. 모두에게 친절하다는 평판을 지니고 있는 그가 내 이력서를 거부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가 인사팀의 의무감으로 사생활을 보호해 준답시고, 입을 닫아버리면 아쉬울 일이었다. 그래서 보험 하나가 필요했다. 내가 이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널리 퍼뜨려 주 이사의 방 앞까지 그 소리가 들리게 해 줄 사람.


골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감 대리. 빅 마우스일 뿐 아니라 콧대 높은 사람이었다. 당신만이 가지고 있는 ‘프로페셔널함’이 필요하다는 약간의 아부와 함께 이력서를 전달했다.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이력서에는 둘의 구체적인 피드백 내용이 담겨왔다. 나는 피드백대로 이력서를 수정했고, 이사님도 낌새를 알아차린 듯했다. 어디 지원해?라는 주 이사의 퉁명스러운 질문을 듣고 나는 만족하고 말았다. 감 대리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하고 있다.


그 틈을 타, 면접 조언을 구하는 건 덤이었다. 몇 가지 조언을 주고는 우스갯소리로 ‘잘 보고 오지 마라’라고 하는 주 이사였다.


이젠 정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전 15화 J의 충동적이고 완벽한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