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소식
오오 외국계.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축하 한 번 싱겁게 한다 생각하며 픽 웃어버렸다. 그냥 인턴이야. 그렇게 대답하고 속으로 나지막이 그 말을 따라 해 봤다. 오오 외국계.
학교 근처에서 만난 우리는 ’아지트‘라고 부르던 술집을 갔다.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곤 했는데 이젠 정말 아무도 모르겠다느니. 그래도 분위기는 똑같다느니. 뒷방 늙은이 같은 얘기를 하며 주문을 했다.
오랜만에 보는 탓에 할 얘기가 많았다. 지인부터 우리 근황, 그리고 우스운 추억. 이야깃거리는 계속 피어났다.
저녁 대신으로 시킨 해물탕과 모둠 소시지를 다 먹어치우고, 카프레제 샐러드를 시킨 참이었다. 나는 한창 회사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하고 있는 일부터 못살게 구는 사업부 차장 얘기. 주저리주저리 떠들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쏟아내고 있었다.
너 그 회사 좋아하는 것 같은데?
별안간 그런 감상을 내리는 친구였다. 연애 상담이라도 하듯이. 그럴 리가, 나 계속 면접 보고 있다니까. 정규직 될 가능성도 없어. 여태껏 한탄했는데 왜 그런 결론이 난 건지. 내가 짝사랑을 회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생각엔 너 거기 오래 다닐 것 같다.
구태여 그 말에 대답하진 않았다. 그녀의 생각일 뿐이다. 설탕을 묻힌 건빵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계속 인턴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는 말인가. 건빵이 입안에서 텁텁하게 바스러졌다.
주황빛 간접 조명만 몇 개 달랑 켜둔 내부는 어둑해서 좋다. 발밑도 간신히 보이는 데다 상대의 얼굴도, 내 표정도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수도꼭지에 틀어둔 물처럼 흘렀다.
면접장일 때도, 회사 모니터 앞일 때도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면 금세 주말이었다. 쉬는 날이라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카페로 장소만 바뀔 뿐 노트북을 꺼내 면접 준비를 하기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주말마다 틈틈이 적어둔 자기소개서에는 수많은 내가 있었다. 이커머스를 사랑하는 취업준비생이 되기도, 뉴스룸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은 홍보팀 직원이 되기도 했다.
정성스레 다린 정장을 입고 면접 장소로 가는 날엔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중에는 불안한 취업준비생이나 면접이 가기 싫은 인턴은 없었다.
그렇게 비슷한 듯 다른 날들이 지나던 중, 샴 차장이 미팅룸으로 불러낸 어느 날이었다. 잠깐 시간이 되냐는 샴 차장의 말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중대 발표를 할 것처럼.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간의 실수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작은 것부터 치명적인 실수까지. 그중 어떤 것이 가장 유력한가. 샴 차장을 따라 미팅룸으로 향하는 신발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불이 켜지지 않은 미팅룸. 통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그런대로 아늑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샴 차장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랜아, 혹시 지금도 다른 회사 지원 중이야?
고민하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이사님이 니 자리 만든다고 계속 준비 중이셔.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을 몇 초간 이해할 수 없었다. 니 자리. 이사님. 머릿속에 붕붕 떠다니는 문장의 단어들을 조합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 이사님이 계속 컨펌받는 중이고.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알잖아. 만들기 힘든 거. 그래도 조만간 좋은 소식 들릴 거야. 물론 면접 봐야겠지만. 어쨌든 프랜아, 미리 축하해.
축하. 축하. 자리로 돌아와 영어 단어라도 외우듯이 그 단어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생각하는 바람에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져 버렸다. 한참을 생각해 내고 나서야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뭘 축하한다는 걸까. 아직 된 것도 아닌데. 될 확률이 높으니 확률 높음을 축하한다는 걸까. 그건 이상한데. 될 거라고 확신하는 걸까.
내 생각에는 너 거기 오래 다닐 것 같다.
며칠 전 그렇게 말한 친구가 생각났다. 예리하긴.
그날 하루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미팀룸의 조도와 붕붕 뜨는 마음이 티가 날 새라,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어 답답했던 기억뿐이다.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이곳의 면접 준비가 우선이었다. 자기소개서를 수정하거나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고지를 코 앞에 두고 시간을 뺏을 순 없는 일이었다. 회사 업무도 계속해야 했기에, 다시 야근에 돌입했다.
몇몇 직원이 또 야근이냐며 한 마디 씩 했지만, 이젠 그 걱정들이 살갑게 느껴졌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좋은 소식 들려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