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랑 Jul 19. 2018

좋은 글이란?

범우의 시선에서 듀나의 슬립스트림까지

내가 처음 진지하게 글을 쓴 곳은 아이러니하지만 '딴지일보'였다. B급 황색언론을 표방한다는 오만불손한 안내문을 무시하고 들어갔다가 덜컥 발목 잡혔다. 그리고 2015 하반기부터 2016년 상반기까지 딴지일보 기사란에 가장 많은 글을 올린 필진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한 가지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20년 넘게 써온 글 솜씨란 것이 형편없다는 거.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대충 알겠는데, 좋은 글을 쓰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언제부터인가 글을 볼 때마다 작자가 무슨 생각과 가치관으로 썼는지 짐작하는 버릇이 생겼다. 누구나의 글에선 글쓴이의 향기가 배어난다고 믿는 나다. 독자의 취향에 억지로 맞춘 흔해빠진 이야기가 아닌, 어디서도 들을 수 없던 그 사람만의 진솔한 이야기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잘 쓰인 글의 홍수 속에서 우연히 좋은 글이 눈에 띄었다. 글쓴이는 딴지에서 '범우시선'이란 시리즈를 이어가던 이였는데 어떤 사람이길래 저런 글을 쓸 수 있나 궁금했다. 그리고 그의 글 중에 하나가 내 마음속 깊이 세겨졌다.


* * *


이곳저곳 전전하며 글의 다양성을 넓히다가 SF라는 곳에 다시 도달했다. 어려서 집에 이상하게끔 책이 잔뜩 있었는데, 그중에는 당시 유행하던 공상과학소설 전집도 여럿 있었다. 놀잇감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방학이면 방에 처박혀서 책만 읽었고, 지금으로 치면 SF의 고전 명작은 거의 다 봤던 것 같다.


수십 년이 지나서 다시 접한 SF는 예전에 알던 그 세계가 아니었다. 뭔가 족보가 가득했고, 알기도 어려운 용어로 잔뜩 포장되어 있었다. 일전에 딴지일보 죽돌 편집장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분석하면 엘랑님 아닌가요?"

그렇다. 난 재수 없는 분석쟁이다. 뭔가 필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알아내야 직성이 풀린다. 계산기 탁탁 두들기는 건 취미고, 공개된 도표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은 여가생활일 뿐.

외국 SF작품들이야 이미 평가가 뻔하니 접하기 쉬웠다. 사실 괜찮은 작품 위주로 들어오니까 아무거나 읽어봐도 대략 괜찮았다. 대략....

그럼 우리나라 작가들의 SF작품은 어떨까? 잘 모르는 세계니 일단 검색부터 해봤다. 몇 명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고, 그들의 작품을 찾아 헤맸지만 정작 제대로 읽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아니, 없었다기보다는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범우의 글이 생각났다. 난 노동이니, 서민의 삶과 애환을 그린 평범한 이야기는 질색이었어도 좋은 글이었기에 본능적으로 숨죽여 읽었다. 좋은 글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관심 없는 분야일지라도 그 은은한 향기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국내 SF 작품들은 정반대였다. 엄청난, 주목받는, 무슨 무슨 입상을 한.... 다 부질없다. 글에서 향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거기서부터 삐딱선을 탔나 보다. 표현되는 것과 달리, 내 느낌이 동하질 않으니까 그 현상에서 오류를 찾아내고 싶었다.


왜 유독 국내 SF소설에 날을 세우게 되었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도 사람이라서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뭔가 선입견이 생기면 극복하기 어려운 존재일 테니. 어렴풋한 그 형체가 명확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작가가 스스로를 속였기 때문이다. 그런 글은 아무리 잘 썼더라도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어느 날 국내 최고의 슬림스트립 SF작가라는 듀나 씨의 트윗 글을 봤다. 마침 'EM 드라이브'라는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굳이 허구로 증명되기 시작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올렸더라.


"혹시 내가 예전에 썼던 글 중에서 EM 드라이브를 소재로 한 것은 없었나?"


조금, 많이 실망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국내 SF작품에 손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나 경험에 바탕해서 소설을 쓴 것이 아닌, 그냥 용어를 차용해서 쓴 SF소설은 무조건 판타지다. 연애 한 번 안 해본 작가의 소설에선 가슴 도려내는 사랑의 아픔을 엿보기 어렵고, 인생을 평온하게만 살아온 작가의 작품에서는 인간 본성 끝자락의 처절함이 배어 나오지 않는다. 범우의 글은 그 짧은 생에서 느꼈던 온갖 회한과 감정이 글자로 함축되어 향기가 되었다.

만약 범우가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런 글을 썼다면 그렇게 감동받지 못했을 거다.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일상을 담담히 서술하는 것만큼 독자에게 와 닿는 글이 없다. SF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평소 생각, 경험, 그리고 지식은 고스란히 글자로 박제되어 전달된다.



뱀발) 간만에 가서 봤더니 범우시선이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더라. 작년까지만 해도 인터넷에 글을 남기는 데 만족하는 듯 보였지만, 책으로도 볼 수 있다니 기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책 내기 강의도 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