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여대공들
러시아 황실에서는 꺼리는 이름들이 몇몇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여성들의 이름에 대해서 꺼리는 이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이 꺼리는 이름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은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여성형으로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을 가진 황제가 여럿있었던 러시아 황실에서는 꽤나 즐겨쓰는 이름으로 정착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 여대공들은 대대로 불행하거나 어려서 죽었다고 알려져있기에 황실에서 점차 꺼리는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첫번째 불운했던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파벨 1세의 딸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이었습니다. 파벨 1세의 첫번째 딸이자 세번째 아이였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은 부모가 기른 첫번째 아이였습니다.파벨 1세와 마리야 황후는 위의 두 아들인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을 파벨 1세의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뺏겼었습니다. 이후 내리 여섯딸들이 태어났고 그 뒤에 두 아들이 태어났기에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부모의 손에서 컸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불운은 첫 약혼 상대부터 시작됩니다. 알렉산드라 여대공의 할머니였던 예카테리나 2세는 손녀를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결혼시키려했습니다. 젊은 국왕과 여대공은 잘 어울리는듯했고 여제는 스웨덴 국왕이 결혼을 발표할줄 알았습니다만,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알렉산드라와의 결혼을 파토낸뒤 도망가버렸습니다. 노쇠했던 여제는 결국 이 사건뒤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는데 아마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듯합니다.
파혼했어도,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러시아의 여대공이었으며 곧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이자 프란츠 2세의 동생이었으며 헝가리의 팔라틴이었던 요제프왁 결혼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환영받지 못했는데, 먼저 가톨릭을 믿던 합스부르크가문에서 정교회를 믿는 신부였던 알렉산드라는 일단 종교적 문제에서 이질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의 손윗 동서이자 황후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의 첫아내와 닮았던 알렉산드라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프란츠 2세의 첫번째 아내는 알렉산드라의 이모였습니다.)
러시아의 여대공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비였던 알렉산드라는 1801년 아이를 낳고 난 뒤 산욕열로 사망했습니다. 그때 알렉산드라의 나이는 겨우 17살이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라 여대공의 남편이었던 요제프는 아마 죽은 아내를 사랑했었던듯합니다. 아내가 죽은뒤 아내를 위해 영묘를 지었으며, 알렉산드라가 죽은 한참뒤에 재혼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두번째 불운했던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니콜라이 1세의 딸이었던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입니다. 니콜라이 1세의 막내딸이었던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고모이자 17살의 나이로 사망했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이름을 땄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아름다움으로 이름 높았던 외할머니를 닮았던 알렉산드라는 위트있고 교육마저 잘 받았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는 딸이었습니다.
1843년 말 러시아 궁정에는 한명의 남자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는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사실 알렉산드라의 언니인 올가와의 혼담을 위해서 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와 알렉산드라는 서로에게 반했고, 늘 다정했던 성격이었던 올가는 동생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바랬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알렉산드라는 행복하게 결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결혼직후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이때문에 결혼후에 시댁으로 가는것을 미뤘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844년 8월 알렉산드라는 아이를 조산했고 그날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의 부모는 사랑했던 딸을 잃은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오래도록 아내를 잊지 못했고, 알렉산드라가 죽은 9년뒤 프로이센의 안나와 재혼합니다. 그리고 이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세번째 불운했던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파벨 1세의 손녀였던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여대공이었습니다. 알렉산드라 여대공의 아버지는 파벨 1세의 막내아들이었던 미하일 대공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옐레나 대공비는 후에 황실가족들과 잘 지냈고, 황실가족들이 존경하던 인물이긴 했었습니다만 남편과의 사이는 별로였다고 합니다. 미하일 대공과 옐레나 대공비 사이에서는 다섯딸이 태어났고 아마 아들을 바랬던 대공은 딸만 태어나자 그다지 좋지 않았던 아내와의 관계가 더 멀어졌을듯합니다.
미하일 대공의 다섯딸중 둘만 성인으로 성장하고 나머지 딸들은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역시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네번째 불운했던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이었던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이었습니다.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알렉산드르 2세의 첫번째 아이이자 첫번째 딸로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는 이 딸을 너무나 사랑했고 서재에서 일을 할때 딸을 곁에 앉혀놓는 것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역시 18살에 낳은 첫딸인 알렉산드라를 매우 아꼈었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황녀는 7살이 되기전 수막염으로 사망했고, 첫아이를 병으로 잃은 부모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황제는 평생 알렉산드라의 기일을 중요한 날짜로 기억했으며 황후는 어린 딸을 늘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알렉산드라 여대공들이 사망한뒤, 아마도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은 여대공들에게 꺼리는 이름이 되었을듯합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딸인 알렉산드라 여대공이 어려서 사망한뒤에, 황실에서는 더 이상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을 잘 안썼으며 이런 상황은 아마도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의 여대공들이 젊거나 어려서 죽은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