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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30. 2017

남들이 러시아로 갈때 난 스웨덴!!

가벼운 역사 이야기 : 시드니 스미스 경 (1764-1840)

스스로 "시드니 스미스"라고 불렀던 윌리엄 시드니 스미스는 영국 해군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었으며 후에는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인물로 매우 능력있는 인물이었다고 알려져있다. 훗날 나폴레옹은 그에 대해서 "그는 내가 내 운명을 놓치게 만든 인물이다"라고 언급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능력 있는 시드니 스미스는 젊은 시절 남들과 다른 행동을 했고 그 결과 그의 뛰어남을 인정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시드니 스미스


19세기초반까지도 "국가"(Nation)이라는 개념이 그리 확고하지 않았었다. 이 때문에 가끔씩 군인들은 자기네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복무하는 경우가 종종있었다. 

범선시대 해군인력은 매우 귀중한 인력이었다. 범선을 다루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기술을 익히는 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이 시대의 장교들은 매우 어린시절부터 배에서 살면서 배에 대한 기술들을 익혔다. 이런 이들이 놀게 된다면 매우 지루하거나 힘든 일이 될것이었다.


상비군이 도입된 이후 어느나라 어느시기나 그럴것이지만 상비군의 숫자는 전쟁이 일어났을때의 군인 숫자보다 적었다. 이런 상황은 해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결국 전쟁이 없는 시기에는 필요없는 인력은 은퇴나 잠시 쉬고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half pay라고 불렀는데 은퇴하거나 해군으로 현직에 있지 않은 장교들에게 연금으로 원래 월급의 반을 준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붙여졌었다. 이런 half pay 상태가 되면 해군들은 하는일 없이 놀거나 그래야했는데 월급도 깍이고, 익숙치 않은 육지생활을 해야하는등 해군에게는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 되었고 가끔 정부의 허락받고 다른 나라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혁명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국은 나름 평화로운 상황이었으며 많은 장교들이 half pay상태가 되었다. 몇몇 해군장교들은 다른 나라의 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 떠나게 되는데 이들이 가게 된 것은 바로 스웨덴과 러시아의 전쟁이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3세는 쿠데타로 의회에 뺏긴 권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전통적 스웨덴의 국왕들처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숙적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당시 숙적은 러시아였다. 특히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전투를 위해 발틱함대를 흑해로 보내면서 전력이 비게 되자 이를 노려서 러시아에 뺏긴 핀란드 지역을 다시 되찾기 위한 전투를 시작했다. 하지만 1789년 1차 스벤스크순드 해전에서 대패하게 했다. 이에 구스타프 3세는 스스로 직접 군대를 지휘해서 이를 만회하려했다. 그리고 1790년 이런 구스타프 3세에게 영국의 해군 장교인 시드니 스미스가 복무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


시드니 스미스는 젊은 해군 장교였지만 이미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었던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구스타프 3세는 소중한 인적 자원이 될수 있는 시드니 스미스를 환영했으며 그에게 작은 선단을 이끌도록 명했다고 한다. 사실 이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영국 해군 장교는 시드니 스미스뿐만 아니었다. 다른 영국인 해군 장교들 역시 이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단지 그들 대부분은 스웨덴이 아니라 러시아 측에 가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이전에 이미 스웨덴은 러시아에 패배했었고 누가 봐도 러시아 측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할수 있었을 것이다.


1790년 7월 비보리만에서 다시 한번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는 스벤스크순드 전투(Battle of Svensksund)라고 불리는데 이때 스웨덴은 러시아에 대승을 거두게 된다. 스웨덴은 겨우  6척의 배만 손실을 입었고 사상자 수도 1000명 이하였던 반면, 러시아는 60-80척의 배를 잃었으며 사상자도 만명에 달했었다. 그리고 시드니 스미스는 이 전투에서 기대에 저버리지 않고 공을 세우게 되었고, 이에 구스타프 3세는 기뻐하면서 그에게 스웨덴 군인에게 하사되는 최고의 훈장인 검훈장을 수여했었었다. 그리고 조지 3세는 시드니 스미스가 이 검훈장을 패용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외국 훈장은 함부로 달수 없어서 정부나 국왕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국에서도 이제 그가 sir지위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궁정을 출입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소리로 한단계 높은 신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790년의 스벤스크순드 전투때의  러시아와 스웨덴 군


문제는 시드니 스미스가 훈장을 받은 그 전투에 다른 많은 영국 해군이 러시아측으로 참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패배는 곧 시드니 스미스의 동료들의 패배였으며 심지어 이 전투에서 영국 해군 장교 6명이 사망했기에 동료들 사이에서는 시드니 스미스가 동료를 죽이고 명예를 얻었다고 쑥덕대기에 이르렀다. 그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한 사람들은 그를 "스웨덴 기사"라고 비아냥댔는데 이것은 두가지 의미였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외국 작위로 으스대는 것이라는 정도의 비아냥이었다. 하지만 스벤스크순드 전투에서 죽은 해군 장교들의 친척이나 친구들 그리고 그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스웨덴 기사라는 소리는 "동료를 죽이고 얻은 작위"라는 비난이 가미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안 좋은 시선은 시드니 스미스의 영국 해군 경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난 뒤 1793년 툴롱이 영국 해군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툴롱을 다시 되찾으려 했었는데 영국은 결국 툴롱을 내줄수 밖에 없었다. 이때 영국군은 철수하면서 툴롱의 항구 시설과 전함들을 폭파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수행하기로 한 사람중 한명이 바로 시드니 스미스였다. 하지만 톨롱의 항구 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시드니 스미스에게 비난이 쏟아지게 된다.

하지만 이 작전은 에스파냐군과 합동으로 하는 작전으로 시드니 스미스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했으며 다른 사람이 수행하지 못한 임무까지 더해냈었다. 게다가 시드니 스미스는 이때 현직이 아니었음에도 전쟁 소식을 듣고 스스로 툴롱까지 찾아와서 임무를 자원했었다. 이런 그에게 과한 비난이 쏟아진것은 이전의 상황과도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시드니 스미스는 영국 해군으로 다시 복귀했고 그는 지중해등에서 매우 큰 활약을 하는 인물이 되었다.


아크레 포위 공격때의 시드니 스미스, 나폴레옹의 운명을 놓치게 한 전투들중 하나-0-;;;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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