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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Dec 15. 2017

러시아를 점령한 4명의 여제들(2)

러시아의 여제들 : 옐리자베타 여제와 예카테리나 2세 

1740년 10월에 안나 여제가 사망하고, 여제의 유언대로 태어난 지 2달 된 이반 6세 Ivan VI가 즉위한다. 안나 여제는 유언장에 미리 이반 6세의 섭정을 맡을 인물을 지정해두었는데, 어린 황제의 어머니 안나 레오폴도브나는 이 섭정을 축출하고 스스로 섭정 지위에 올랐다.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도 러시아 정치는 여전히 안정되지 못했다. 이런 기류를 포착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 Elisabeth Petrovna다. 옐리자베타는 황실 근위대의 주요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으며, 기다림 끝에 기회를 잡게 된다. 


1741년 11월의 어느 밤, 옐리자베타는 아버지가 창설했던 황실 근위대에 가서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근위대는 옐리자베타의 계획에 동조했으며, 어린 황제가 있는 겨울 궁전을 향해 나아갔다. 근위대는 궁전의 수비병을 제압하고 황제와 그 부모를 구금했다. 옐리자베타는 아이와 부모를 수도에서 떨어진 성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스스로 러시아의 제위에 올라 옐리자베타 여제가 되었다.   


옐리자베타 여제


옐리자베타는 아버지 표트르 대제를 닮아 강인했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특히 그녀의 조카며느리였던 예카테리나는 어느 가장무도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옐리자베타 여제가 어느 날 가장무도회를 열면서 남자는 여자로, 여자는 남자로 의상을 바꿔 입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무도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모두 작달막한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오직 1명의 여성만이 남다르게 키가 크고 늘씬한 남성의 모습으로 나타나 눈에 띄었다. 바로 옐리자베타 여제 본인이었다. 

내부적으로는 개혁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강함을 널리 알렸던 옐리자베타 여제는 스스로 쿠데타를 통해 여제가 되었기에 다른 쿠데타가 또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제위에 오른 뒤 1번도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 않았으며, 매일 밤 가면무도회 등을 열어 사람들을 묶어놓았다고 한다.  


10대때의 옐리자베타 여제


옐리자베타는 여러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고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공식 후계자를 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표트르 대제가 사망한 뒤 벌어진 혼란스러운 상황이 모두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옐리자베타는 일찌감치 자신의 유일한 조카인 언니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해두었다. 


독일 출신이었던 그는 황위 계승자로서 러시아에 왔으며,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표트르 표도로비치 Pyotr Fyodorovich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다. 또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카의 신붓감으로 독일에 있는 작은 공국의 공녀를 선택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얻는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인이라기보다는 독일인에 더 가까웠다. 그는 독일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러시아인들은 그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다. 표트르 3세는 매우 유약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귀족들의 세력도 억누르지 않았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간 수많은 사람들을 조건 없이 석방했다. 표트르의 측근조차도 그의 자비로움이 독이 될 것을 걱정했다고 전해진다.   


표트르 3세,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 옐리자베타 여제의 조카, 예카테리나 2세의 남편, 파벨 1세의 아버지


표트르의 정책은 러시아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특히 근위대는 큰 반감을 가졌다. 게다가 표트르 3세가 기존 근위대를 해산하고 독일에서 근위대를 데려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위기감을 느낀 근위대는 표트르 3세를 제거할 궁리를 한다. 그들이 선택한 새 인물은 표트르 3세의 황후이자 최대 정적이었던 예카테리나였다.  


황태자비 시절의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 3세와 모든 점에서 맞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후계자가 없었으나 예카테리나는 끊임없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결혼한 지 8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기다리던 후계자를 얻은 옐리자베타 여제는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시키겠다며 예카테리나에게서 파벨을 빼앗아 갔다. 예카테리나는 점점 고립되어갔다. 이 때문에 그녀는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러시아인의 삶을 이해하고 스스로 러시아인이 되려 했다. 표트르 3세와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점차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부부는 서로 정적이 되었다.  


표트르 3세는 아내를 제거하고 자신의 정부와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예카테리나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가 아이를 낳은 직후에 들이닥쳐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녀를 추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예카테리나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녀는 표트르 3세가 병정놀이나 불구경 같은 것을 좋아하니 아이를 낳을 때 그의 집에 불을 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표트르 3세가 불구경에 빠진 틈을 타 아이를 빼돌렸고, 곧 자신을 찾아온 남편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를 쫓아낼 구실을 잡을 수 없었다. 남편의 공격을 막아냈으니 이제 그녀가 공격할 차례였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 그리고 둘의 아들인 파벨 1세


쿠데타는 성공했으며,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아내의 손에 감금되었다. 표트르는 아내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예카테리나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옛 황제를 살려두지 않았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정적을 완벽하게 제거했고, 여제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녀는 러시아의 오래된 법률을 개혁해 새로운 정부 형태를 시도했고 러시아를 완전한 서유럽식 국가로 만들려 했다. 문화, 예술, 교육 사업에도 힘을 썼으며 활발한 대외 사업을 했다. 예카테리나가 통치하는 동안 러시아는 매우 큰 발전을 이루었다. 영토가 확장되었고 인구가 늘어났으며 산업이 발전했고 재정이 매우 튼튼해졌다. 그녀는 표트르 1세 이후 러시아를 재편하고 러시아의 영화를 다시 구현한 황제였다. 그래서 표트르 1세가 표트르 대제로 불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를 끝으로 러시아에서 여제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대관식 복장의 에카테리나 2세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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