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브리스트의 반란과 미하일 밀로라도비치 백작
근대 러시아의 여러 사건들중 예술가들이나 다른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사건은 바로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할때쯤 일어났던 반란 사건일 것이다. 니콜라이 1세의 형인 알렉산드르 1세는 적자가 없었기에 동생이 후계자가 될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에게는 여러 동생들이 있었는데 알렉산드르와 함께 자라났던 동생 콘스탄틴과 거의 부자 관계만큼이나 나이차가 났던 니콜라이와 미하일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생들중 한명을 후계자로 지명해야했는데 많은 이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뒤를 잇는 인물이 바로 밑의 동생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1세가 정한 후계자는 그가 아니라 그 밑의 동생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대공이었다. 콘스탄틴 대공은 황위에 미련이 없었으며 심지어 귀천상혼해버림으로써 황위계승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해버렸다. 결국 알렉산드르 1세는 마음을 비우고 "인기없는" 동생인 니콜라이를 후계자로 내정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생부부에게 바로 황위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지만, 앞날은 누구나 알수 없는 것이었고 황제 역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니콜라이는 황위를 물려받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니콜라이가 황위를 잇는것을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유언장에는 분명히 니콜라이를 명시했었지만, 그 사실을 믿게하는데 시간이 더 걸릴것이었기에 조언자들중 한명은 니콜라이에게 차라리 콘스탄틴 대공을 기다리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니콜라이 역시 형에게 충성맹세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폴란드에 있던 콘스탄틴 대공은 동생에게 이미 충성맹세를 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분명히했다.
이런 혼란한 과정에서 많은 군인들은 이제 러시아도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해야한다고 여겼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유럽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유주의를 배워왔다. 황제가 철권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준수해야하고 아니면 더이상 황제가 필요하지 않는 나라를 꿈꾸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황위계승 상황이 혼란한 가운데 더욱더 활발하게 발전된다.
결국 1825년 12월 25일(구력으로는 12월 13일), 결국 니콜라이는 황위를 받아들였고 황위를 잇는다는 선언을 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다음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장에 모여들었다.이들은 보수주의자이자 인기 없던 니콜라이가 아니라 형인 알렉산드르 1세와 함께 교육을 받아서 자유주의자였다고 알려진 콘스탄틴이 황제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자 상황은 점점 더 위협적인 상황으로 발전하게 된다.
러시아 황실 가족들은 이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알고 있었고 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상황이 악화되기전에 모여든 이들을 해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한 인물이 나서게 된다.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사였던 밀로라도비치 백작이었다.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밀로라도비치 백작은 군인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한 인물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물론 러시아-투르크 전쟁에도 참전한 인물로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 매우 뛰어난 전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있었다.
당시 밀로라도비치는 니콜라이에 충성스러운 인물이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장관으로 지역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몰려든 군중을 해산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니콜라이의 명을 받은 백작은 스스로 광장으로 가서 협상을 하려했다. 하지만 주변의 장군들은 상황이 위험하니 가지 말고 군대와 함께 있으라고 충고했었다. 하지만 백작은 이를 거절했고 자신주변의 참모와 함께 광장으로 갔다. 그는 자신의 말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는 콘스탄틴 대공의 검을 가지고 갔고 모두들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켰다.
하지만 밀로라도비치 백작은 역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던 표트르 카크호프스키에게서 총을 맞게 된다. 아마도 군중을 해산하려던 그의 시도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총에 맞은 백작은 근처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밀로라도비치 백작은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면서 총한번 맞지 않았고 부상한번 당하지 않았기에 "행운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국에서 동포가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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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니콜라이 1세는 이들을 해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광장에 포도탄을 쏘면서 무력으로 진압했고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이날의 경험은 그가 강력한 독재정치로 러시아를 다스리는 시작이 되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