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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ug 12. 2023

들어가는 글 : 포르투갈 왕가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 역사 : 첫번째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된 시기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8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고 거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장악됩니다. 하지만 곧 기독교 세력들 역시 이슬람 세력에 대해서 저항을 시작합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 내의 상황은 복잡하게 흘러가는데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에 뺏긴 영토를 회복하는 과정이었습니다만, 이런 기독교 국가들 내부의 문제로 나라들이 쪼갈라지거나 통합되는 일등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게 됩니다. 


포르투갈 왕국의 문장


11세기 후반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는 사위였던 부르고뉴의 앙리에게 포르투갈 백작령을 줬으며 딸인 테레자를 결혼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 앙리와 테레자의 아들이었던 아폰수 엔히크는 결국 1139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포르투갈 왕국을 성립했고, 자신은 포르투갈의 첫번째 국왕인 아폰수 1세가 됩니다. 이후 1179년에는 교황으로부터 포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 국왕임을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이후 포르투갈은 독립된 왕국으로의 지위를 완전히 굳히게 됩니다.


아폰수 엔히크,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 포르투갈의 첫번째 국왕


아폰수 1세로부터 시작된 부르고뉴 왕가는 14세기까지 유지됩니다만, 부르고뉴 가문 출신의 페르난두 1세가 남성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베리아 반도는 여성의 계승권리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페르난두 1세의 딸에게 왕위계승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베리아 반도의 나라들은 자주 정치적 문제로 대립하거나 동맹을 맺었고 이것은 왕가 간의 결혼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페르난두 1세의 딸인 베아트리스 역시 카스티야의 국왕과 결혼했기에, 만약 베아트리스를 여왕으로 받아들일 경우 포르투갈은 카스티야에 합병될 위험이 있었고 결국 포르투갈 내에서 베아트리스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서 내전이 발생합니다. 이 내전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베아트리스를 반대했던 사람들로, 이들은 베아트리스의 숙부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이었지만 서자였기에 왕위계승권리가 없었던 주앙을 국왕으로 받아들였고 포르투갈의 주앙 1세가 됩니다.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1세, 아비스 가문의 첫번째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는 이전에 아비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으며 이 때문에 주앙 1세 이후 포르투갈을 통치한 주앙 1세의 남성 직계 후손들을 아비스 가문으로 부르게 됩니다. 아비스 가문 역시 16세기가 되면 남성 후계자가 단절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포르투갈의 공주였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어머니의 권리를 통해서 자신의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포르투갈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한동안 포르투갈은 에스파냐 국왕들이 통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포르투갈은 반발했으며 결국 아비스 가문의 후손이지만 역시 서자였기에 왕위계승권리가 없었던 브라간사 공작 가문이 포르투갈 독립을 주도했으며, 브라간사 공작이었던 주앙이 결국 독립된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가 됩니다.


브라간사 공작 주앙, 후에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 


주앙 4세는 부계로는  왕위계승권리가 없는 브라간사 가문 출신이었지만 모계로는 왕위계승권리가 있는 포르투갈 국왕의 후손으로 역시나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명분을 더 얻을수 있었습니다. 주앙 4세는 브라간사 공작이기에 주앙 4세 이후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가문을 브라간사 가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19세기가 되면서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은 복잡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인해서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로 피난 갔었으며 포르투갈에서는 자유주의가 활발해졌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뒤 포르투갈 왕가는 복귀했지만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주앙 6세의 아들이었던 페드루는 스스로 브라질 황제로 즉위했었으며 후에 포르투갈의 왕위도 이어받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로 포르투갈 왕위는 딸인 마리아에게 브라질 황제 지위는 아들인 페드루에게 물려줬습니다. 포르투갈 내 정치 상황이 혼란했기에 마리아의 즉위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표적 인물이 페드루의 동생이었던 미겔이었죠. 이에 페드루는 미겔과 자신의 딸인 마리아를 결혼시키기로 합니다만, 미겔은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미겔은 쫓겨나게 되고 마리아가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페르디난트와 결혼했고 마리아와 페르디난트의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됩니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4세


하지만 20세기가 되면서 포르투갈은 공화정이 되었으며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마누엘 2세는 포르투갈 왕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마누엘 2세는 후손없이 사망했으며 마리아와 페르디난트의 후손들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계열의 남성 직계 계승자는 없어집니다. 그리고 마누엘 2세는 죽기전 미겔 1세의 손자였던 두와르테 누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습니다. 이후 가문의 수장은 다시 브라간사 공작 가문의 후손입니다.

현재 포르투갈은 공화국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성립된 이후 800년간 포르투갈은 국왕이 통치하는 나라였으며 포르투갈의 역사는 포르투갈 국왕을 비롯한 왕가 사람들과 깊이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나라들은 여성의 왕위계승권리를 인정했고, 포르투갈 역시 여성의 계승권리를 인정하는 나라였습니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 왕가의 여성들 포르투갈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왕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포르투갈의 역사와 깊이 연관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페드루 4세의 딸


이번 이야기를 통해서 포르투갈의 왕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포르투갈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 알아볼까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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