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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02. 2023

딸이라도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는거지!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 역사 : 네번째

이베리아 반도 지역은  독일 프랑스등과 달리 통치 가문의 여성 영지 상속을 초기부터 인정해줬습니다. 사실 상속문제는 매우 애매한 것이었는데 특히 영지 상속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와도 연결이 되기에 여성의 상속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 역시 정치적인 해석이 강하게 작용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유럽과 중부유럽지역에서는 여성의 영지 상속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여성의 영지 상속을 배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이 다른 가문으로 결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영지와 작위가 동일시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위를 얻으려면 영지가 있어야 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통치가문의 여성이 영지를 상속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토지를 얻는 것을 넘어서 그 지역의 통치권리도 상속받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여성이 다른 가문으로 시집갔는데 그녀에게 상속권리가 있어서 아버지의 영지와 지위를 상속받는다면, 그 영지와 지위는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여성의 영지 상속을 금지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성들의 영지 상속을 금지하는 법을 살리카법 Lex salica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프랑크인들의 첫번째 국왕이었던 클로비스가 만들라고 명령한 민법으로 관습법을 문서로 기록한 성문법이었습니다. 살리카 법은 그 자체로도 매우 큰 의의를 가지지만, 후대의 상속법에 끼친 영향때문에 더 유명해졌습니다. 살리카 법에서는 여성의 토지 상속을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가는데 이것은 후대에 여성의 영지 상속 금지의 근거가 되는 법률로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즉위할 무렵,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어머니 이자벨을 통해서 필리프 4세의 남성후손임을 들어 프랑스 왕위계승을 주장했고, 프랑스에서는 살리카법을 근거로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계승을 거절했었습니다.


7세기말-8세기초 메로빙거 왕가 시절의  살리카 법에 따른 판결


하지만 현재 독일이나 프랑스 지역을 제외한  북유럽이라던가 브리튼섬이라던가 동유럽이라던가 이베리아 반도 같은 지역에서는 비록 아들이 우선권을 가지긴 했지만 딸들의 영지 상속권리 역시 인정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포르투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의 경우 시작부터 이미 여성이 상속받은 경우라고 생각할수 있었습니다. 레온의 테레자는 남편이 죽은 뒤 포르투갈의 여백작으로 포르투갈을 통치했었습니다. 이런 전통은 아마도 이후 포르투갈의 국왕들이 딸들에게 영지를 따로 떼어주는데 어느정도 거리낌이 없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레온의 테레자, 포르투갈의 여백작, 국왕 아폰수 1세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첫 번째 국왕이었던 아폰수 1세에게는 두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큰딸인 우라카와 둘째딸인 태래저거 있었습니다. 아폰수 1세 역시 중세 시대의 군주였으며 딸들을 정략결혼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대상으로 봤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첫째딸인 우라카를 레온과의 평화를 위해서 레온의 국왕 페르난도 2세와 결혼시켰을 것입니다. 우라카는 남편과 헤어져야해야했으며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삶을 마감했습니다만 남편이 준 재산으로 졍제적으로는 어려움 없이 살았었습니다.


아폰수 1세가 둘째딸인 테레자 역시 정략결혼을 시키려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169년 아폰수 1세는 레온과의 전투중 큰 부상을 입고 장애가 생겼으며 이에 통치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그렇기에 섬정이 대신 통치해야했으며 이 섭정 지위를 처음에는 테레자의 남동생이자 아폰수 1세의 후계자였던 상슈가 맡게 됩니다. 하지만 상슈가 섭정 지위를 장악하게 되면서 상슈에게 불만을 품는 귀족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상슈가 국왕도 아니면서 국왕의 권한을 휘두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상슈를 견제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상슈와 동등한 권한을 다른 이가 있어서 상슈를 견제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테레자였습니다. 곧 테레자는 상슈와 함께 공동 섭정으로 이름을 올렸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 역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것은 상슈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테레자가 포르투갈의 여왕이 될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이나 포르투갈 왕가에는 다행히도 상슈와 테레자는 서로 반목하기 보다는 서로를 돕는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섬정기간동안 테레자는 주로 내정을 맡았으며 상슈 1세는 외정을 맡았었습니다. 테레자가 후계자로 인정받은 것은 좋은 것만은 아니었는데, 테레자가 포르투갈을 통치할 권리를 가지게 되면서 테레자는 절대 이웃의 나라들인 레온이나 카스티야 아라곤 같은 곳에서 남편감을 찾을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찾아도 친족결혼으로 결혼무효화됐을 가능성이......) 먼곳에서 남편감을 찾아야했기에 테레자의 결혼은 늦어지게 되었고, 당대 기준으로는 혼기를 완전히 벗어난 나이인 30대가 될 때까지 미혼으로 지냈었습니다. 1183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테레자에게 청혼을 했으며, 테레자는 30대의 나이로 플랑드르 백작과 결혼해서 포르투갈을 떠났고 이후 플랑드르 지역에서 거주했었습니다. 


테레자, 플랑드르의 백작부인


상슈 1세는 아마도 누나와의 협업이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었으며 이것은 그가 딸들에게 포르투갈내 영지를 부여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상슈 1세는 죽기전 작성한 유언장에서 딸들에게 영지를 주는데 특히 위의 세딸들인 테레자, 상샤,마팔다에게 포르투갈의 핵심 지역에 대한 영지 소유권리를 인정했으며 그곳의 통치권리와 세금을 걷을 권리를 인정해줬을 뿐만 아니라 딸들의 아폰수와 동등하게 왕위계승권리가 있다고 인정해주게 됩니다. 아마도 상슈 1세는 딸들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며 딸들에게 편온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당시에 큰딸이었던 테레자는 레온의 국왕과 결혼했다가 헤어진뒤 포르투갈로 돌아왔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상슈1세의 세딸들, 테레자, 상샤, 마팔다, 테레자와 마팔다는 결혼이 무효가 된뒤 수녀원에 들어갔고, 상샤는 원래 수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슈 1세의 유언은 이전의 상슈 1세가 누나인 테레자와 좋은 결말을 맺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상슈 1세의 아들인 아폰수 2세는 아버지의 유언이 포르투갈을 누이들에게 쪼갈라 나눠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누이들이 받은 지역은 누이들의 후손들이 상속받을수 있었는데, 큰누나인 테레자의 경우 레온의 국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들이 있었으며 특히 아들인 페르난도는 레온 국왕의 후계자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테레자가 상속받은 영지를 페르난도가 이어받게 되고, 페르난도가 레온의 국왕이 된다면 그 지역은 영토문제로 늘 갈등을 빚던 레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며 이것은 큰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상슈 1세가 딸들에게 통치권리를 부여한 지역은 포르투갈의 핵심지역중 하나였으며 아폰수 2세는 만약 이곳이 따로 떨어져나가게 된다면 포르투갈이 완전히 쪼갈라지게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국왕인 아폰수와 동등한 왕위계승권리를 누이들이 가진다면, 아폰수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된것처럼 누이들은 포르투갈의 여왕이 되어야했습니다. 실제로 누이들은 아폰수와 갈등한 동안 스스로를 포르투갈의 여왕이라고 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폰수 2세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아폰수 2세는 국왕으로 이런 상황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아버지의 유언을 집행하길 거부합니다.


아폰수 2세


당연히 아폰수 2세의 누이들은 이에 대해서 반발했으며 포르투갈내 많은 귀족들 역시 아폰수 2세의 누이들을 지지합니다. 아마도 상슈 1세의 유언장은 정당한 것이고 딸들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것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아폰수 2세가 독단적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막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여겼던듯합니다. 아폰수 2세의 동생인 페드루 역시 형이 아닌 누이들 편을 지지했었습니다. 결국 두 세력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아폰수 2세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만 누이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으며 이것은 그의 치세 내내 큰 불안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폰수 2세가 죽고 난뒤 아들인 상슈 2세가 즉위한 뒤였습니다. 상슈 2세는 고모들에게 할아버지가 준 영지의 통치 권리와 영지에 대한 수입을 인정해주는 대신, 고모들이 영지에 대한 상속권리와 포르투갈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고 합니다. 


상슈 2세


이후 포르투갈 왕가에서는 여전히  딸들에게 영지를 부여해줘서 평온하게 살수 있는 수입을 얻게 해주는 경우가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시대의 혼란함을 잘 알았기에 영지의 상속권리나 영지에 대한 통치 권리에 대한 조건을 강화해서 그 영지가 포르투갈 왕국에  남아있을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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