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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16. 2023

사랑에 미치다.: 페드루와 이녜스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여섯번째

 1849년 프랑스의 화가로 주로 역사화를 많이 그렸던 피에르 샤를 콩트는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의 미술 작품 전시회인 파리 살롱에 출품하기 위한 그림을 하나 그립니다. 이 그림에는 죽은 한 여성의 시신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키스하는 사람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려져있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1361년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식으로, 이것은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1세와 그의 연인이었던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는 살해당한 자신의 연인이었던 이녜스 데 카스트로를 자신의 아내로 선포했으며 이에 그녀의 시신을 꺼내와서 신하들에게 왕비인 이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인 페드루와 이녜스의 사랑이야기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이기도 했었습니다. 


1361년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


페드루와 이녜스의 이야기의 시작은 페드루의 누나인 포르투갈의 마리아가 사촌이었던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11세와 결혼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알폰소 11세는 이전에 역시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카스티야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이었던 빌렌나 공의 딸인 콘스탄사 마누엘과 결혼하기로 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어려서 왕위에 오른 알폰소 11세가 친정을 한 직후였기에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빌렌나 공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했었으며 결국 미성년인 그의 딸인 콘스탄사 마누엘을 왕비로 만들겠다고 한것이었습니다. 1325년 14살의 알폰소 11세와 9살이었던 콘스탄사 마누엘과의 결혼이 정식으로 인정되었으며 콘스탄사는 알폰소 11세의 아내로 “왕비”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콘스탄사 마누엘은 미성년이었기에 결혼은 바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알폰소 11세는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제 더 이상 빌렌나 공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당시 알폰소 11세는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강화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사촌이었던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혼한 것과 다름없는 약혼녀인 콘스탄사 마누엘이 있었습니다. 결국 콘스탄사 마누엘과의 결혼을 깨기 위해서 알폰소 11세는 콘스탄사 마누엘을 성에 가두기까지 합니다. 이에 반발한 콘스탄사 마누엘의 아버지인 빌렌나 공은 딸을 위해서 알폰소 11세와 전쟁을 할 정도였었습니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 페드루 1세의 사촌이자 매형


알폰소 11세는 기어이 콘스탄사 마누엘과 헤어진뒤 사촌이었던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결혼 직전 그는 카스티야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레오노르 데 구스만이라는 여성과 만나서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습니다. 레오노르와 사랑에 빠지긴 했지만 정략 결혼 역시 필요했기에 알폰소 11세는 포르투갈의 마리아와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페드로가 태어난 뒤, 알폰소 11세는 마리아를 떠나서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대놓고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정식 아내를 버리고 정부와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왕비인 마리아에게 모욕이었으며, 이런 모욕을 마리아는 물론 마리아의 아버지인 아폰수 4세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사위이자 조카인 알폰소 11세를 응징하려 들었으며 강제로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헤어지도록 압박을 했습니다. 알폰소 11세는 장인이나 교황의 압력으로 마지못해서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헤어지는척했지만 곧 다시 레오노르에게 돌아갔고 이것은 포르투갈과 카스티야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레오노르 데 구스만, 알폰소 11세의 왕비였던 마리아는 남편이 죽은뒤 레오노르 데 구스만을 처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폰수 4세는 알폰소 11세가 화가 날만한 동맹을 찾아냅니다. 바로 알폰소 11세의 전약혼녀였던 콘스탄사 마누엘과 그녀의 아버지인 빌렌나 공이었습니다. 아폰수 4세는 자신의 아들인 페드루를 콘스탄사 마누엘과 결혼시기로 결정했으며 , 이에 빌렌나 공은 자신의 광대한 영지의 상당부분을 떼어내서 콘스탄사 마누엘의 지참금으로 줬었다고 합니다. 


1340년 콘스탄사 마누엘은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인 페드루와 결혼햇으며, 콘스탄사 마누엘을 따라서 많은 카스티야 귀족들이 포르투갈로 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콘스탄사 마누엘의 시녀로 일하기 위해서 따라온 이녜스 데 카스트로도 있었습니다. 


이녜스 데 카스트로는 갈리시아의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포르투갈 왕가와 카스티야 왕가와도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었습니다. 페드루는 결혼식때 아내의 시녀인 이녜스 데 카스트로를 만나서 그녀에게 반해버리게 됩니다. 이녜스 데 카스트로 역시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였던 페드루에게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둘은 바로 사랑에 빠졌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금방 눈치채게 됩니다. 페드루의 아내인 콘스탄사 마누엘은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첫 아들을 낳은 뒤 이녜스 데 카스트로를 아이의 대모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콘스탄사 마누엘이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것으로 중세시대에는 아이의 부모와 대부모는 친족관계로 여겨졌기에, 페드루가 아들의 대모인 이녜스와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은 근친상간이 될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일찍 죽어버렸으며 이 때문에 이녜스 데 카스트로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더욱더 커지게 됩니다.


이녜스 데 카스트로, 19세기 그림


페드루가 이녜스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사실 개인적인 문제만 있었다면 둘은 함께 지낼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아내가 아닌 정부와 함께 사는 것은 죄악이라고 여겨지긴했었지만 수많은 왕가의 사람들은 많은 정부들이 있었으며 이들과 함께지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페드루의 매형이었던 알폰소 11세도 정부인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함께 살기 위해서 페드루의 누나인 마리아를 버렸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가 이녜스에게 빠져들게 되면서 이것은 정치적 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페드루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남자형제들을 아꼈으며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문제는 이들이 카스티야 내부의 정치 문제에 깊숙이 연루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페드루 1세, 19세기 그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는 아내인 마리아와 적자인 페드로보다 정부인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그녀의 아이들을 더 총애했고 수많은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페드로와 마리아가 불만을 품는 원인이 되었으며 결국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그녀의 아들들과 마리아와 페드로가 경쟁을 벌이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편을 나누어서 지지하는 인물들이 달랐습니다. 


페드루는 이녜스 주변의 카스티야 귀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게됩니다.이것은 페드루의 아버지인 아폰수 4세가 용납할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사위가 못마땅하긴 했지만 카스티야 내부의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은 포르투갈에도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폰수 4세는 아들과 이녜스 데 카스트로를 떼어내기 위해서 이네스를 1344년 궁정에서 추방해서 멀리 보내버리게 됩니다. 아폰수 4세는 이렇게 하면 둘 사이가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페드루는 멀리 떠난 이녜스를 찾아가 관계를 지속했으며 둘의 관계는 더욱더 깊어지게 됩니다. 


페드루와 이녜스, 20세기


1349년 페드루의 아내였던 콘스탄사 마누엘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합니다. 콘스탄사 마누엘과 페드루 사이에서는 딸인 마리아와 아들인 페르난두만이 살아남았습니다. 페드루는 아내가 죽자 이제 대놓고 이녜스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페드루의 아버지인 아폰수 4세는 아들이 동맹이 될만한 외국 공주와 결혼하길 원했지만, 페드루는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고 이녜스만을 아내로 원한다고 말하면서 다른여성과의 결혼을 거부했습니다. 부자간에 이 문제를 두고 다퉜지만 페드루는 아버지의 계획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녜스와 함께 지내면서 자녀들도 얻게 됩니다. 특히 페드루가 이녜스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아폰수 4세는 더욱더 이녜스와 이들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는데 특히 자신의 적자 손자인 페르난두는 매우 허약하지만, 이녜스의 자녀들은 매우 건강한 것을 더욱더 걱정스러워합니다. 페르난두가 살아있는한 페드루의 후계자는 페르난두이지만, 만약 페르난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페드루는 분명 이녜스의 자녀들을 왕위계승자로 만들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폰수 4세는 아들과 이녜스가 헤어지는 일은 이녜스가 사라지게 만드는 것밖에 없다고 여겼으며 1355년 1월 페드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녜스에게 암살자들을 보냈습니다. 세명의 암살자들은 이녜스를 살해하게 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죽기전 아폰수 4세에게 애원하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 19세기 작품


페드루는 이녜스가 살해당한뒤 당연히 아버지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페드루의 어머니이자 아폰수 4세의 아내인 베아트리스 왕비가 둘을 중재해서 둘은 화해했다고 합니다. 


1357년 페드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됩니다. 막 국왕이 되었을떼 페드루는 이녜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막 국왕이 된 상태에서 힘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1360년 페드루는 이제 이녜스의 명예와 지위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녜스를 위한 일을 실행합니다. 먼저 페드루는 자신이 이녜스와 비밀리에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이며 따라서 둘의 자녀들 모두 왕위계승권리를 가진 적자라고 선언합니다. 페드루는 결혼을 증명하기 위한 모든 증거를 제시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녜스를 살해한 암살자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처형합니다. 세명중 두명만이 잡혔으며 둘은 처형당했습니다만, 한명은 카스티야로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후 페드루는 그가 죽기 직전에 그를 사면해줬다고 합니다.


페드루 1세, 17세기 


그리고 1361년경에는 화려한 무던 두 개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랑하는 아내인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시신을 옮겨와 묻습니다. 다른 하나는 페드루 자신이 죽은 뒤 묻힐 무덤이었습니다. 페드루는 이녜스가 죽은뒤 더 이상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매우 다양한 상상을 통해서 과장된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그림의 모티브가 된 이야기는 16세기쯤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합니다. 또 

18세기 포르투갈의 왕가에서 새로운 영묘를 건설해서 페드루와 이녜스의 무덤을 이장할 때 둘의 관을 서로 마주보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후 “페드루가 관배치를 이렇게 해서  심판의 날에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서로를 바라볼수 있도록 했다”라는 이야기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페드루와 이녜스의 사랑이야기와 살해당한 이녜스의 이야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복수를 다룬 페두르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상상을 할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페드루가 이녜스를 자신의 왕비로 인정시키기 위해 시신에 충성맹세를 하도록 강요했는 이야기나 죽은뒤 심판의 날에 제일먼저 서로를 보려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과장된 이야기는 사실은 아니지만, 중세시대 정략결혼이 일상이던 시기에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했으며 사랑하는 여인이 살해당하자 그녀의 복수를 하려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흥미있는이야기이며 오래도록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 19세기 작


더하기

...하지만 중세시대는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순정남처럼 묘사될수 있는 페드루가 이녜스가 죽은뒤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부 역시 있었고 그 정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아비스의 주앙이 결국 포르투갈의 왕위를 잇는다는 이야기는 뭐랄까 페드루와 이녜스의 사랑이야기에서 사알짝 배신감을 느끼게 할수도 있는 요인입니다. 뭐든 적당히 알아야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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