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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23. 2023

잘못된 선택으로 악명이 남다 : 레오노르 텔레스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 일곱번째 

페르난두 1세의 왕비이자 카스티야의 왕비가 되는 베아트리스의 어머니인 레오노르 텔레스 데 메네세즈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1383년-1385년 사이 공위 시대가 시작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 역사에서는 레오노르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게 평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레오노르 텔레스 데 메네세즈, 페르난두 1세의 왕비, 인판타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 데 메네세즈는 카스티야와 레온 등에서 힘을 가지고 있던 귀족 가문이었던 텔레스 데 메네세즈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혈연적으로는 아스투리아스 왕가나 포르투갈 왕가와도 접점이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레오노르의 할머니는 이네스 데 카스트로의 이모였으며 이것은 레오노르의 아버지인 마르팅 아폰수 텔로 데 메네세즈와 숙부(또는 백부)인 주앙 아폰수 텔로 데 메네세즈가 페드루 1세와 가까워지는 원인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특히 주앙 아폰수 텔로는 페드루 1세가 매우 신뢰한 신하였으며, 이후 페드루 1세의 아들인 페르난두 1세 역시 그를 신뢰했었다고 합니다. 레오노르의 아버지인 마르팅 아폰수 텔로 데 메네세즈는 페드루 1세의 누나이자 카스티야의 왕비였던 포르투갈의 마리아의 집사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는데 후에 마리아와 마리아의 아들인 카스티야의 페드로가 갈등을 빚을 때 살해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레오노르는 1365년 포르투갈의 귀족이었던 폼베이로 백작 주앙 로렌소 다 쿠냐와 결혼했었습니다. 그리고 궁정에서 페르난두 1세의 이복 여동생인 인판타 베아트리스의 시녀로 일을 했었습니다. 페르난두 1세는 이때 레오노르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페르난두 1세는 당연히 레오노르와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이미 레오노르는 결혼한 상태였으며 이 때문에 페르난두 1세는 레오노르와 레오노르의 남편인 폼베이로 백작이 친족관계이기에 결혼을 무효화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고 결국 무효화 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포르투갈 사람들은 페르난두 1세와 레오노르가 결혼하는 것을 엄청나게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훗날 일부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레오노르의 첫번째 결혼이 무효화 된 것이 아니고 이 때문에 페르난두 1세와 레오노르의 결혼은 중혼이 되어서 레오노르의 딸인 인판타 베아트리스 역시 계승권리가 없는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페르난두 1세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카스티야와의 평화를 위해서 페르난두 1세가 카스티야의 인판타와 결혼해서 평화를 유지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르난두 1세는 평화협정으로 카스티야의 인판타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마저 깨버렸기에 더욱더 레오노르와 페드루의 결혼에 대한 불만이 커졌을 것입니다.

      

페르난두 1세는 왕비가 된 레오노르에게 여러 영지를 부여해주면서 그녀의 재산을 늘여주게 됩니다. 아마도 페르난두는 자신의 왕비가 된 레오노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왕비가 가질수 있는 영지를 많이 줘서 레오노르의 힘을 강화시키려 했을 듯합니다. 레오노르는 남편의 사랑을 등에 업고 결혼 초부터 정치에 참여하면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그녀를 싫어하게 만들었습니다.특히 레오노르는 카스티야의 국왕인 페드로를 지지했었으며, 이후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가 페드로를 살해하고 국왕이 되었을 때 포르투갈로 망명했던 페드로의  지지자들을 대놓고 중용하는등의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카스티야 왕위계승문제에 포르투갈이 휩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아마도 이런 상황은 페르난두 1세가 자신에게 카스티야 왕위계승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는데 영향을 줬을 것입니다.      


특히 레오노르는 페드로가 죽은뒤 포르투갈로 온 갈리시아 출신의 귀족이었던 주앙 페르낭데스 데 앙데이로를 최측근으로 삼았으며 그는 레오노르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가 됩니다. 이것은 안그래도 궁정에 나쁜소문이 파다했던 레오노르에 대한 더 안 좋은 소문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1382년 레오노르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며칠뒤 의문사하게 됩니다. 당대 설명으로는 더운 날씨 때문에 아이가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하지만, 이미 레오노르가 앙데이로와 연인관계였으며 국왕은 둘 사이를 의심해서 레오노르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이의 생명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기도 합니다.   

   

어쨌든 레오노르와 페르난두 1세 사이에서는 딸인 베아트리스 외에는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으며 페르난두 1세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게 되면서 자신과 딸의 처지를 고민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페르난두 1세는 카스티야와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자신의 자녀들을 카스티야 왕가의 사람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자신의 사생아 딸인 베아트리스를 카스티야의 후안 1세의 이복형제이자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의 사생아 아들인 알폰소 엔리케스와 결혼시켰으며, 유일한 적자딸인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의 후계자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1382년 8월 후안 1세의 아내인 아라곤의 레오노르가 죽으면서 레오노르와 앙데이로는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하자고 페르난두 1세에게 건의하게 됩니다. 레오노르는 사실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들인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아들들을 딸인 베아트리스의 경쟁자로 보고 있엇습니다. 이들은 성인 남성들이었기에 만약 남편이 죽는다면 어린 여자아이인 베아트리스는 왕위를 뺏길수 있다고 여겼으며, 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딸의 권리를 지켜줄 강력한 카스티야의 국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한것입니다. 결국 페르난두 1세는 이것을 승낙했고, 베아트리스는 1383년 5월 겨우 11살도 안된 베아트리스는 자신보다 15살 많은 애딸린 홀아비였던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결혼해서 카스티야로 가게 됩니다.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을 떠난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합니다. 그가 죽으면서 베아트리스의 결혼 협정에 따라 어머니였던 레오노르가 섭정으로 임명되어서 베아트리스와 후안 1세를 대신해서 통치하게 됩니다. 당연히 레오노르의 최측근이었던 앙데이로 역시 레오노르가 섭정이 되면서 포르투갈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페르난두 1세의 장례식


이 상황에서 리스본은 두 개의 파로 나뉘게 됩니다. 먼저 베아트리스와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카스티야의 후안 1세를 국왕으로 인정하려는 쪽과 오래도록 갈등을 빚어왔던 카스티야의 국왕이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쪽 둘이 있었습니다. 특히 거부감을 느끼는 쪽의 중심인물은 바로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이자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아비스의 주앙이었습니다. 특히 카스티야의 국왕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쪽에서는 당시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레오노르에게 아비스의 주앙과 결혼해서 포르투갈을 계속 통치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레오노르는 이를 거절합니다.     


레오노르의 거절은 사람들이 앙데이로과 레오노르의 관계를 더욱더 의심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앙데이로가 레오노르를 조정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앙데이로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여러번 나오는데 특히 레오노르의 형제중 한명도 암살 시도에 관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1383년 12월 6일 아비스의 주앙은 앙데이로를 살해합니다.      


앙데이로를 살해하는 아비스의 주앙, 19세기


레오노르는 자신의 측근인 앙데이로가 자신의 옆에서 죽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자신과 앙데이로를 보호할만한 힘을 가진 사람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바로 사위인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였습니다. 사실 후안 1세는 이미 장인인 페르난두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부터 포르투갈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내에서 반발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또 베아트리스의 숙부들인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아들들이 왕위계승을 주장할 것에 대한 우려 역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장모인 레오노르의 요청에 후안 1세는 바로 아내인 베아트리스와 군대를 데리고 포르투갈을 향해 가게 됩니다. 이렇게 카스티야의 포르투갈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앙데이로의 시신을 보고 절규하는 레오노르, 20세기 작품


레오노르는 딸과 사위인 후안 1세가 포르투갈로 오자 사위의 요청대로 섭정 지위를 포기합니다. 아마도 레오노르는 정당한 왕위계승자인 딸과 사위가 왔으니 자신은 섭정 지위를 내려놔도 된다고 생각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레오노르가 포르투갈을 카스티야 국왕에게 넘겼다는 이미지를 남기게 됩니다. 


  이후 레오노르는 1384년 카스티야로 갔으며 그곳 수도원에서 사망합니다. 레오노르가 살았던 곳은 딸인 베아트리스의 궁정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레오노르에 대한 기록에서는 레오노르가 섭정 지위를 사위와 딸에게 넘겨준뒤 이것을 후회했고 딸과 사위에 대한 암살음모를 꾸미려다 발각되어서 카스티야로 갔으며 그곳 수도원에 감금되어서 살다가 사망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레오노르의 이야기는 주로 레오노르에게 적대적인 기록자가 남긴 기록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기에 레오노르의 삶의 기본적인 사항에서 더욱더 부정적 이야기만 강조하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이런 부정적 기록 역시 사실을 바탕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기록은 기록하는 사람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어떤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쓴 기록은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 내용이나 부정적 평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이 후세에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그 사람에 대한 나쁜 기록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아마 레오노르는 미숙하고 잘못된 결정을 했었고 그렇기에 포르투갈의 혼란을 초래하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오노르의 행동이 시초가 되긴했지만 레오노르가 나서지 않았다고해도 결국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의 왕위는 결국 레오노르의 정적이라고 할수 있는 주앙 1세가 이어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포르투갈 국왕들은 모두 주앙 1세의 후손들이기도 하구요.


 레오노르에게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모두 레오노르의 악명만을 강조하는 기록입니다. 게다가 레오노르의 행동이나 판단은 결국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안 좋은 상황으로 나가는 행동이나 판단이었기에 결과론적으로 레오노르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레오노르의 악명이 포르투갈의 역사에 영원이 남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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