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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ug 26. 2023

근친혼은 원래 금지야!!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 역사 : 세번째 -

이베리아 반도의 왕가들은 매우 혈연관계가 강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뒤 생긴 나라들은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팜플로나 왕국(나바라) 두 개였으며 이 두 개의 왕국의 왕가가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는 여러 왕가들의 조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팜플로나의 국왕으로 “대왕”이라는 칭호로 알려지게 되는 산초 3세의 아들들은 각각 팜플로나,아라곤,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이 되었으며 산초 3세의 손자들이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모든 나라들인 팜플로나,아라곤,레온,카스티야,갈리시아를 통치하는 국왕이 되었습니다.      


이들 나라의 왕가는 혈연적으로 친척관계이긴 했지만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 동맹을 맺거나 전쟁을 했었는데 이를테면 산초 3세의 손자들로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 받아서 모두 산초였던 팜플로나, 아라곤, 카스티야의 세 국왕들은 잇권을 위해서 전쟁을 했었으며 이때 전쟁을 세명의 산초들이 전쟁을 했다고 해서 “세 산초들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갈등 상황은 서로의 국가간 평화협정으로 이어지고 이 협정을 보증하기 위해서 왕가의 사람들끼리 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베리아 반도의 나라들의 왕가는 혈연관계였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근친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팜플로나의 산초 3세와 후손들, 이 산초 3세의 손자들인 세명의 산초들은 패권다툼을 해서 전쟁을 했고 이를 "세산초들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엘아라


정치적 목적이기에 근친혼을 했지만, 사실 교회법에서는 근친혼을 매우 엄격하게 금지했었습니다. 특히 결혼에 대해서는 교회의 영향력이 컸으며 교회법상으로 결혼 요건을 갖추지 못하거나 금지한 결혼을 할 경우 그 결혼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를 거부할 경우 복잡한 분쟁을 거쳐야하는데 심할 경우는 파문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종교가 생활의 중심이었던 서유럽의 중세시대에 파문을 당하는 것은 매우 큰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상황은 이런 근친혼의 기준과 판결 역시 시대나 정치 상황에 따라 모호했고 그 결과 잘살고 있는 부부가 헤어져야하거나 아니면 교회에 대 수도원을 지어서 기부하고 돈과 권력을 부여하면 면죄부를 얻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특히 근친혼의 기준 범위가 시대에 따라서 변화했는데 가장 엄격할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의 오대조 이내의 조상중에 겹치는 조상이 있을 경우에는 근친결혼으로 보기도 했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정략결혼을 했던 많은 왕가나 재산을 위해서 친족결혼을 했던 이들의 결혼이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불만도 커지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 교회에서는 근친혼이더라도 특별히 결혼을 허용하겠다는 사면장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후대에 가면 이런 사면장을 난발하게 되면서 근친혼에 대한 규정이 유명무실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2세기 가톨릭 교회에서는 근친혼금지를 매우 엄격하게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포르투갈 역시 건국된 초기부터 이웃의 레온과 카스티야와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정치적 목적으로 평화를 위해서 결혼동맹이 필요했습니다. 아폰수 1세와 상슈 1세는 딸들을 딸들을 주변 국가와 동맹을 위해서 정략결혼시켰지만 이 결혼들은 교회의 간섭으로 전부 무효화 되었고, 포르투갈의 공주들은 남편과 강제로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와야했었습니다. 


초기 포르투갈 왕가의 가계도


첫번째 결혼이 무효가 된 포르투갈의 공주는 아폰수 1세의 딸인 우라카였습니다. 우라카는 아폰수 1세의 장녀로 1165년 레온의 국왕이었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했습니다. 레온은 포르투갈과 직접적으로 붙어있던 지역으로 특히 포르투갈 북쪽의 갈리시아 지방을 두고 자주 다툼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레온의 국왕인었던 페르난도 2세는 포르투갈과의 전투에 어느정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햇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형인 카스티야의 산초 3세가 일찍 죽고 미성년인 알폰소 8세가 즉위한 카스티야쪽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레온이 카스티야에 관심을 돌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전에 갈등을 빚었던 포르투갈과는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두 나라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이 보증으로 아폰수 1세의 딸인 우라카가 레온의 국왕인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우라카, 아폰수 1세의 딸, 레온의 왕비


레온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한뒤 우라카는 1171년 8월 아들인 알폰소를 낳게 됩니다. 보통 왕비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는 것은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때 우라카는 도리어 레온의 왕비라는 지위가 매우 불안정해지게 됩니다. 바로 교회가 우라카와 페르난도 2세의 결혼에 대해서 테클을 걸었던 것입니다. 우라카와 페르난도 2세는 육촌관계로 교회에서 금지한 근친혼 범위내에 들어갔으며, 결국 1172년경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둘의 결혼이 근친혼임을 들어 무효로 선언합니다. 둘의 결혼이 무효가 되면서 둘은 이제 함께 살수 없었고 우라카는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생활했고, 페르난도 2세는 재혼상대를 찾게 됩니다. 이 상황은 우라카의 아들인 알폰소를 어렵게 만드는데 부모의 결혼이 무효화 되었기에 그가 적자 신분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알폰소가 레온의 국왕이 될때까지 가장 큰 약점으로 남게 됩니다. 

   

둘의 결혼이 무효화 된 것은 굉장히 정치적인 관계 때문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우라카는 페르난도 2세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았는데 이 때마침 결혼이 무효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페르난도 2세와 갈등을 빚던 카스티야의 영향력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카스티야의 국왕으로 페르난도 2세의 조카였던 알폰소 8세는 잉글랜드의 공주였던 엘리노어와 결혼했었습니다. 엘리노어의 아버지인 헨리 2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정치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으며 결국 레온과 카스티야가 갈등을 빚고 잇는 상황에서 알렉산데르 3세가 강력하게 페르난도 2세의 결혼무효를 선언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입니다.     


레온의 페르난도 2세와 포르투갈의 우라카(추정)




재미난 것은 페르난도 2세는 우라카와 헤어진 뒤 갈리시아의 귀족가문인 트라바 가문 출신으로 카스티야의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던 라라 가문으로 시집갔었던 테레자 페르난데스 데 트라바와 재혼합니다. 테레자는 카스티야의 강력한 귀족이었던 남편이 죽은 뒤 레온 궁정으로 왔으며 페르난도 2세와 재혼합니다. 그런데 사실 페르난도 2세의 두 번째 아내인 테레자 역시 페르난도 2세와 친족관계였습니다. 사실 테레자는 인판타 우라카의 고모로, 포르투갈 여백작이었던 레온의 테레자와 그녀의 연인으로 비밀결혼한 것으로 추정되는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의 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페르난도 2세와 테레자 페르난데스 데 트라바의 결혼 역시 교회입장에서 보면 근친혼으로 결혼 무효가 될 조건이 었습니다만, 테레자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때까지 레온의 왕비로 지냈었습니다.      


페르난도 2세와 인판타 우라카의 아들이었던 알폰소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레온의 국왕 알폰소 9세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먼저 부모가 결혼 무효로 헤어졌기에 왕위계승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레온 내부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었기에 서쪽의 포르투갈과 동쪽의 카스티야가 레온을 노리게 됩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알폰소 9세 역시 둘 다 싸울수 없었기에 한쪽과 우선적으로 평화를 추구합니다.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외삼촌이었던 상슈 1세였고, 평화를 위해서 사촌으로 상슈 1세의 딸인 포르투갈의 인판타 테레자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교회는 강력히 반발하는데 특히 당시 교황이었던 첼레스티노 3세는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힘을 쓰고 있었으며 여러 세속의 군주들과 대립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알폰소 9세가 사촌과 결혼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결혼을 무효화 시켰습니다. 물론 이때 알폰소 9세와 인판타 테레자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있었고 교황은 이 자녀들에 대해서는 사생아가 아닌 부모의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자녀들과 똑같은 지위를 부여해줬었습니다만 어쨌든 결혼은 무효화 됩니다. 테레자는 딸들을 데리고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포르투갈로 돌아오게 됩니다.

 

포르투갈의 테레자, 상슈 1세의 딸, 레온의 왕


알폰소 9세는 인판타 테레자와 헤어진뒤 포르투갈의 테레자와 결혼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카스티야의 인판타였던 베렝겔라와 결혼합니다. 당연히 베렝겔라 역시 알폰소 9세와 친족관계였으며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다시 한번 이 결혼을 근친결혼임을 들어서 무효화했습니다.


레온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의 베렌겔


상슈 1세는 다른 딸인 마팔다를 역시나 카스티야의 국왕 엔리케 1세와 결혼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 역시 교황권을 강화하려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역시 근친혼에 미성년으로 결혼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효화 되었고 마팔다는 역시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왔습니다. 

     

포르투갈의 마팔다, 카스티야의 왕비


우라카의 아버지인 아폰수 1세나 테레자의 아버지였던 상슈 1세는 당연히 딸의 결혼이 근친결혼임을 알았지만 정치적 이유로 딸들을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왕국으로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에 의해서 결혼무효화 되어서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와야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포르투갈 국왕들은 여전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친족인 이베리아 반도 내 다른 왕가들로 딸들을 시집보냈습니다. 물론 이후 교회는 근친결혼의 범위를 좀 더 축소했으며 또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이 교황과 교황청의 중요한 후원자로 자리잡으면서 이베리아 반도 내 왕가들간의 결혼에 대한 사면장을 자주 발행해줬습니다. 그렇기에 후대의 포르투갈의 인판타들은 여전히 근친결혼을 하지만 우라카나 테레자처럼 결혼이 무효화 되는 경우는 거의 없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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