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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10. 2023

1640년의 쿠데타와 포르투갈 독립 전쟁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열네번째

올리바레스의 중앙 집권 정책은 포르투갈에 부담을 줬으며 심지어 포르투갈이 그저 펠리페 4세가 통치하는 하나의 거대한 나라의 일부 지역으로 여겨지게 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반발하게 됩니다. 일부 귀족들은 포르투갈과 마드리드에 있던 펠리페 4세와 그의 정부 관리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포르투갈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고 세금 문제나 군대 문제등에 대해서 합의점을 찾으려했지만, 올리바레스의 확고한 중앙 집권 정책을 바꿀수 없었으며 결국 포르투갈측의 귀족들 역시 이런 올리바레스의 정책에 등을 돌리고 자신들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을 하려합니다.     


올리바레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기에 “세바스티앙이즘”이라는 일종의 구세주 신앙과 비슷한 민간 설화가 떠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사라진 아비스 가문의 국왕 세바스티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며 언젠가는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정당한 왕위를 주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이런 민담이 더 활발히 되었으며 결국 포르투갈의 독립적 지위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리바레스는 결국 에스파냐의 전쟁에 포르투갈군을 보내려했었으며 포르투갈의 귀족들은 포르투갈의 사람들을 모아서 군대를 조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올리바레스의 의도를 따르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당시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잇던 브라간사 공작을 중심으로 이 군대의 지휘를 맡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당장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1640년 올리바레스의 정책에 반발한 카스티야 지방의 반란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갑작스럽게 확대됩니다.      


올리바레스는 당연히 카스티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포르투갈의 군대를 이용하길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지키는 것이 아닌 일에 군대를 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결국 포르투갈 사람들 역시 불만이 폭발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40인의 음모자들이라고 알려진 40명의 포르투갈의 고위 귀족들은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이들은 1640년 12월 1일 궁전으로 쳐들어가서 당시 포르투갈 국정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미겔 데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국왕 필립 3세(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가 보낸 총독이었던 사보이의 마르게리타를 감금합니다. 그후 이들은 당시 포르투갈의 고위 귀족이며 포르투갈 왕위게승권리를 가지고 있던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국왕으로 선포해서 포르투갈의 주앙 4세가 됩니다.      


총독이 감금되고 이후 주앙 4세가 즉위하기까지의 역사화


주앙 4세는 곧 코르테스를 소집했으며 포르투갈의 코르테스는 1641년 1월 주앙 4세를 정식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인정했으며 이제 주앙 4세는 군대를 조직해서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때 에스파냐는 군대를 카탈루냐의 반란과 30년 전쟁 상황 때문에 당장 포르투갈에 보낼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잠깐의 상황동안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귀족들이나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 주앙 4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여전히 필립 3세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필립 3세의 포르투갈의 상속명분은 여전히 통했으며 당연히 필립 3세를 지지했으며 포르투갈에서도 에스파냐를 위해서 30년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 역시 있었습니다. 이런 귀족들에 대해서 주앙 4세는 반역죄로 처형하면서 본보기로 삼고 에스파냐에 대한 독립을 확고히 주장하게 됩니다.      


주앙 4세


당연히 에스파냐는 이런 포르투갈을 가만히 두고 볼수 없었으며 1641년 군대를 파견해서 바로 포르투갈을 진압하려합니다. 물론 주앙 4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 역시 이를 방어했고 이렇게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전쟁의 단계는 세단계로 이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어느정도 전투를 진행한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국지적 소모전으로 이어진 형태이며 마지막으로는 에스파냐가 다시 한번 포르투갈을 장악하려했지만 결국 실패한 형태였습니다.     


전쟁 초기 에스파냐는 빠른 진압을 원했었고 1641년 많은 전력을 투입했습니다만 이 작전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국경을 두고 서로 지속적 전투가 일어나는데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완전히 침공하지 못했지만, 포르투갈 역시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기에 에스파냐쪽으로 진격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국경을 중심으로 전투들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이때는 학살 행위가 이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에스파냐 측에서는 포르투갈 측을 반역자로 여겼으며, 포르투갈에서는 60년간 쌓인 불만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양측의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서 외국인 용병등을 고용했고 이들은 전리품을 위해서 잔학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기에 더욱더 이런 상황을 부채질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에서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안토니우 루이스 데 메네제스 , 포르투갈의 귀족이자 장군으로 독립전쟁의 대부분 전투에 참가해서 큰 공을 세운 인물


1650년대가 되면서 전투는 점차 더 방어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특히 외교적 관계를 더 중요하게 바뀌게 되는데 에스파냐는 프랑스같은 나라를 동맹으로 만들었으며 포르투갈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포르투갈의 경우는 1656년 주앙 4세가 죽고 아들인 아폰수 6세가 즉위하면서 브라간사 왕가가 포르투갈에서 안정적으로 지위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내부의 정치 권력 투쟁이 있으면서 포르투갈 내 상황도 불안정했습니다. 그나마 이전에 적대관계였던 네덜란드나 잉글랜드와 공동의 적인 에스파냐를 대응하기 위해서 평화 조약을 맺은 것이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포르투갈의 아폰수 6세


1660년이 되면서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는 다시 한번 포르투갈을 점령하기 위해서 침공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1662년에는 펠리페 4세의 사생아 아들이었던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포르투갈의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되자 포르투갈은 전통적인 동맹이었던 잉글랜드와 다시 한번 손을 잡습니다. 특히 국왕의 누나였던 카타리나를 잉글랜드의 국왕인 찰스 2세와 결혼시켰으며 아프리카와 인도쪽 영지들인 탕헤르와 인도의 봄베이 지역을 잉글랜드에 할양했으며 또한 식민지내에서 무역 특권등을 제공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 대항할수 있는 영국의 군대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국 내전에 싸웠을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용병으로 구성된 베테랑들로 에스파냐 군을 무찌르고 격퇴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1665년 몬테스 클라로스에서 에스파냐 군과 잉글랜드-포르투갈 연합군이 맞닥들여서 결국 잉글랜드-포르투갈군의 대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몬테스 클라로스 전투


이 전투 이후,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의 중재로 에스파냐와의 평화를 원했지만 에스파냐는 이를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복잡한 외교 관계 때문에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이에 잉글랜드는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는등의 복잡한 외교상황이 일어나게 되지만, 결국 1668년 잉글랜드의 중재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하면서 이렇게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부타 다시 독립했으며, 브라간사 가문이 이후 포르투갈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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