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Nov 24. 2023

브라간사 가문 : 아폰수 6세와 페드루 2세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열여섯번째

 1656년 주앙 4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후계자가 된 인물은 둘째아들이었던 아폰수였습니다. 아폰수는 사실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정치적 문제가 컸기 떼문이었습니다. 당시는 여전히 에스파냐와 독립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었고, 주앙 4세의 권리를 이어받은 아들이 안정적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은 정치적 상징성이 매우 컸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폰수는 13살로 섭정이 필요한 나이였기에 그가 장애 때문에 국정에 관여할수 없다고 하더라도 섭정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그의 즉위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주앙 4세는 죽기전 아내인 루이자를 섭정으로 지명했고, 루이자는 섭정으로 주변의 귀족들과 함께 포르투갈을 통치하게 됩니다.


아폰수 6세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를 견제하기 위해서 여러 외국 동맹을 찾았는데, 특히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강화하게 됩니다. 이런 동맹의 결과가 바로 아폰수 6세의 누나였던 카타리나가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인판타 카타리나가 찰스 2세와 결혼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떠났던 1662년 포르투갈에서는 정치적 내분이 발생합니다. 이때 국왕 아폰수 6세는 성인이 되었고 친정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루이자 왕비나 섭정단들은 아마도 아폰수 6세의 장애를 빌미로 계속해서 섭정단을 통한 국정운영을 지속하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섭정단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불만을 품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당연히 국왕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며 국왕이 친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 루이스 데 바스콘셀로스 이 수사 였습니다. 그는 국왕을 설득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어머니에게서 섭정 권리를 되찾으라고 조언했으며 국왕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결국 1662년 루이자 왕비는 궁정에서 물러났고 수녀원으로 떠나야했습니다.      


주앙 4세의 왕비, 루이자 데 구스망


섭정단이 물러난 뒤, 이제 권력은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은 다양한 정책을 통해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유지하려했습니다. 특히 그는 외교적 관계를 강화해서 에스파냐를 압박해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루이 14세가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면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었습니다만, 이런 프랑스에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은 접근했습니다. 프랑스는 포르투갈 문제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이것은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에 접근하기 좋았던 것입니다. 루이 14세는 당연히 공개적으로는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밝힐수 없었지만 포르투갈과 협력관계가 되는데 이를테면 에스파냐 군에 대항해서 포르투갈 군을 재정비해야할 때, 프랑스 군에서 복무하던 숌베르크 백작이 포르투갈로 와서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찰스 2세와 루이 14세 모두가 승인한 일로, 루이 14세는 에스파냐를 위해 표면적으로 숌베르크의 프랑스 지위를 박탈한 뒤 보냈었다고 합니다. 그후 숌베르크는 포르투갈 군의 재편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에스파냐에 대한 포르투갈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하게 됩니다.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 루이스 데 바스콜셀로스


또한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은 국왕의 신붓감을 프랑스 쪽에서 찾게 됩니다. 그래서 1666년 아폰수 6세는 마리 프랑수아즈 드 사보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느므르 공작의 딸이었던 마리 프랑수아 드 사보이는 프랑스에 정착한 사보이 공작 가문의 분가 출신이었습니다만 프랑스에 오래도록 정착해서 살았으며 프랑스쪽 지위인 느므르 공작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왕가의 친척으로 인정받았었습니다. 특히 마리 프랑수아 드 사보이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은 앙리 4세와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의 아들이었던 방돔 공작 세자르 드 부르봉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마리 프랑수아즈 드 사보이


하지만 마리 프랑수아즈와 아폰수 6세의 결혼은 실패한 결혼이 됩니다.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지만, 후에 마리 프랑수아즈는 남편과의 결혼이 성사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효를 주장합니다. 아마도 이런 실패한 결혼 생활은 당연히 마리 프랑수아즈가 남편인 아폰수 6세나 그 측근들에게 불만을 품고 결국 이들의 반대편에 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카스텔루 멜로르의 정책은 포르투갈의 독립에 유리한 정책이긴 했지만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 역시 늘어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권력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했던 것이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백작은 권력을 잡은후 코스테스를 열지 않았고 이것은 그가 국왕을 인질로 잡고 다른 이들 심지어 의회마저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아폰수 6세의 동생인 페드루를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페드루

결국 1667년 쿠데타가 발생해서 페드루와 그의 측근들이 아폰수 6세와 카스텔루 멜로르의 권력을 뺏습니다. 아폰수 6세의 아내였던 마리 프랑수아즈와 그녀의 측근들 역시 페드루를 지지했었는데 이것은 외교적으로 페드루가 잉글랜드를 지지하던 인물이었으며, 마리 프랑수아즈가 그를 인정한 것은 프랑스 측에서도 페드루를 승인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코르테스가 열린뒤 아폰수 6세에 대한 왕위는 유지되지만, 동생인 페드루가 섭정이 되기로 합니다. 공식적으로 1668년 페드루는 섭정이 되었으며, 아폰수 6세는 국왕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포르투갈의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아조레스 제도로 보내졌습니다. 이후 아폰수 6세는 1674년 리스본으로 돌아왔지만 평생 감시하에 살다가 1683년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은뒤 동생이자 섭정이었던 페드루가 국왕 페드루 2세로 즉위합니다.      

아폰수 6세


페드루는 형을 몰아내고 섭정이 되었지만, 형이 죽을때가지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코르테스에서 형을 국왕으로 인정했으며 자신은 비록 국왕이 아니지만 국왕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후계자 역시 그의 후손이 될 것이기에 국왕이 되는 것 자체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페드루가 섭정이 된 뒤 에스파냐가 결국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했기에 포르투갈 내에서 그의 인기가 더 올라갔을 것입니다.     


페드루는 아마 자신을 지지했던 형수이자 프랑스 세력의 대변인이기도 한 마리 프랑수아즈와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마리 프랑수아즈는 남편이 떠난뒤 잠시 수도원으로 은퇴했지만,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신성해서 승인받습니다. 마리 프랑수아즈의 결혼 무효를 승인해준 인물은 바로 외삼촌이었던 방돔 공작이자 추기경이었던 루이 드 부르봉이었다고 합니다. 결혼 무효를 받은 마리 프랑수아즈는 페드루와 1668년 페드루와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포르투갈 내에서 큰 스캔들이 되기도 했습니다. 둘사이에서는 결혼 다음해에 딸인 이자벨 루이자 주제파가 태어나지만, 이 딸 외에는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리 프랑수아즈


페드루2세는 섭정으로 15년을 통치했고 국왕으로 23년을 통치했습니다. 이런 오랜 통치기간은 포르투갈의 정치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페드루 2세의 통치 시작부터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정리되고 포르투갈의 독립이 정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오래도록 딸인 이자벨 루이자 주제파 외에는 자녀가 없었기에 후계자 문제로 불안했었지만, 그가 오래도록 살아남았고 결훈 많은 후계자들을 얻었기에 이런 문제가 큰 문제로 남지는 않았습니다.     


이자벨 루이자 주제파


페드루 2세는 에스파냐가 독립을 승인하긴 했지만 그에 대한 위협을 대비했으며 영토 방어에 대한 신경을 썼었습니다. 또한 브라질에 대해서 신경을 썼는데 특히 브라질에서 나오는 금같은 귀금속을 들여오는 것과 또한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에스파냐 쪽 식민지와의 애매한 경계선을 확정하는 것 두가지를 신경 썼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페드루 2세가 브라간사 가문 자체에 가장 기여한 점은 바로 후계자 문제일 것입니다. 그는 아내인 사보이의 마리 프랑수아즈와의 사이에서 딸인 이자벨 루이자만이 있었고 이것은 가문의 다른 남성 후손이 없는 상황에서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딸을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약속받았지만, 이것은 딸의 혼담을 어렵게 하는 원인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1683년 형이 죽고 국왕이 된 그해, 아내인 마리 프랑수아즈 역시 사망합니다. 아마도 비록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긴했지만 결국 아폰수 6세는 형이었기에 형의 죽음도 그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래도록 마음을 다했던 아내가 죽자 매우 큰 충격을 받았으며 우울증에 빠져서 딸에게 양위한채 브라질로 은둔하려고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간신히 주변 사람들이 그를 말렸으며 페드루 2세는 다시 힘을 내서 결국 재혼하기로 결정합니다.      


페드루 2세


여러 신붓감이 있었으며, 프랑스쪽과의 다시 한번 동맹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를 얻어야했고 자녀를 많이 낳는 가문의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선택된 사람은 바로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조피 였습니다. 마리아 조피의 부모는 17명의 자녀를 낳았고 14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 조피의 큰어닌인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느는 역시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고 바로 황제에게 후계자가 될 두 아들은 물론 여섯 아이를 낳아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 조피 역시 아이를 많이 낳을 것이며 또한 황후가 언니였고 조카가 황제가 될 것이기에 정치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여성이었기에 페드루 2세는 그녀를 두 번째 아내감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1687년 페드루 2세는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조피와 결혼했습니다.     


팔츠-노이부르크의 미라아 조피


페드루 2세는 두 번째 결혼에서 여덟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그의 장남인 주앙은 결국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국왕이 되었으며, 페드루 2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포르투갈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전 15화 브라간사 가문 : 가문의 기원과 주앙 4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