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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Dec 29. 2023

브라간사 가문 : 주제 1세와 폼발 후작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열여덟번째

주제 1세는 전성기를 누리던 포르투갈을 이어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기는 포르투갈이 점차 쇠퇴하는 시기와 맞물리게 됩니다. 주앙 5세 통치 말기 주앙 5세는 군주와 더 많은 측근들이 권한을 가졌는데, 주앙 5세가 건강이 나빠지게 되면서 그의 측근 신하들이 국정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제 1세는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서 자신이 통치하기 보다는 측근 신하가 통치하도록 했으며 그는 주로 정치제 직접적으로 관여하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제 1세가 총리로 나라를 통치하도록 선택한 인물이 바로 폼발 후작으로 알려지게 되는 세바스티앙 주제 데 카르발루 이 멜루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였습니다. 주제 1세 시기의 정치는 폼발 후작이 주도했는데 폼발후작의 정책은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포르투갈을 개혁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개혁은 1755년 일어난 포르투갈의 비극과 연결됩니다.     


주제 1세


1755년 11월 1일 아침 9시 40분경 리스본 인근 해역에서 지진이 발생합니다. 지진은 3분에서 6분 정도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서 포르투갈 특히 리스본이 직접적 피해를 입었으며, 이베리아 반도 전체와 북아프리카 지역까지도 피해를 입게 됩니다. 현대 추정하기로는 당시 지진의 규모는 진도 7.7이거나 그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진으로 인해서 포르투갈은 엄청나게 피해를 입게 됩니다. 수도 리스본은 완전히 파괴되는데 도심에는 5미터 넓이의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바다가 뒤로 물러가는 쓰나미 징조마저 보았는데, 지진 40분후 쓰나미가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집과 교회의 촛불등이 넘어지면서 도시 전역에서 화재가 일어났으며 이 화재로 인한 피해 역시 막심했습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당시 화염에 쌓인 리스본과 항구에서 쓰나미에 휩쓸린 배를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다른 지역 역시 쓰나미등으로 엄청나게 피해를 입었는데 포르투갈남부 지방 대부분이 지진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쓰나미로 건물들이 쓸려내려갔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의 해외 영지였던 마데이라나 아조레스 군도 역시 막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심지어 후대 연구를 통해서 당시 쓰나미가 브라질에까지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추정하기까지 합니다.     


지진은 포르투갈에 막심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물론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피해를 입었지만, 리스본 인근 해상 지역에서 일어났기에 결국 이쪽에 해안선이 맞닿아있는 포르투갈의 피해가 엄청나게 됩니다. 지진과 이어진 쓰나미와 화재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됩니다.      


지진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사람들


이런 엄청난 피해에서 포르투갈 국왕이었던 주제 1세와 그 가족들은 무사했었습니다. 이들이 무사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제 1세가 가족들과 함께 휴일을 보내기 위해서 리스본을 떠나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진이후 주제 1세는 사방에 벽이 있는 공간에서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 건물안이 아닌 천막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주제 1세는 이런 엄청난 일에 어찌할바를 몰랐고 자신의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던 폼발후작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폼발후작은 “죽은이들은 묻고 산이들은 치료해야한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폼발후작의 구호정책은 매우 효율적이었기에 엄청난 재난이 일어난 뒤임에도 전염병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약탈등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하고 도둑들에 대해서 엄격한 조치를 취하는등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일들을 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엄청나게 빨리 재건되기 시작합니다.      


지진후 약탈을 일삼을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모습


하지만 이 지진은 포르투갈의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줬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포르투갈의 경제 체제는 식민지의 재화에 의존하는 상황이었고 이것은 포르투갈을 언제까지나 지탱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지진은 포르투갈이 언젠가 경험해야할 몰락을 앞당긴것일 뿐이기도 했습니다. 지진이후 폼발 후작은 포르투갈이 이전처럼 강력한 무역과 상업으로 번역을 누리도록 개혁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개혁을 폈는데 이를테면 포르투갈의 주요 생산품중 하나인 와인의 품질을 보증하기 위한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으며 또 강력한 법률과 조세정책을 펴서 노동자는 물론 고위 귀족에게까지도 적용했었습니다.     


특히 폼발후작은 1758년 주제 1세가 암살당할뻔하자 이 암살시도가 국왕의 총애를 받던 타보라 가문의 음모라는 것을 밝히고 타보라 가문 전체와 이 가문의 친인척들을 잔혹하게 처형하면서 다른 귀족들이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막게 됩니다. 후에 폼발 후작의 반대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 사건은 타보라 가문 사람들의 무죄가 선언되었고 폼발 후작의 음모로 알려지게 됩니다만, 이 사건에서 타보라 가문이 과연 국왕의 살해에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폼발 후작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예수회와도 마찰을 빚게 됩니다. 포르투갈 왕가는 예수회와 마찰을 빚고 있었으며, 폼발 후작은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예수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폼발 후작은 이 타보라 사건에서 예수회가 관련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회도 탄압했습니다.     


폼발후작


주제 1세 시기,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의 동맹으로 7년전쟁에서 에스파냐와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포르투갈과 잉글랜드의 동맹을 깨기 위해서 전쟁으로 위협했는데, 폼발 후작은 포르투갈이 잉글랜드에 너무 깊이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장의 위협에 대해서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이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결국 이를 거절했고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침공하게 됩니다. 이 침공으로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전쟁을 해야했는데, 이베리아 반도내에서는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를 물리쳤지만, 아메리카 대륙내의 식민지에서는 서로의 부유한 지역을 뺏고 뺏기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주제 1세는 1777년 사망했는데, 그가 죽을때까지 폼발 후작이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었습니다. 하지만 주제 1세의 후계자인 마리아는 폼발 후작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주제 1세가 죽은뒤 폼발 후작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폼발 후작은 권력을 잃었으며 심지어 사람들의 공격을 당하기도 했었지만, 국왕이 죽은 5년뒤인 1782년 자신의 집에서 평온하게 사망했었습니다.      


그리고 주제 1세의 뒤를 이은 마리아는 포르투갈의 첫 번째 여왕이었습니다만, 마리아는 엄청나게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었습니다.     


마리아 1세, 주제 1세의 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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