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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Jan 05. 2024

브라간사 가문 : 구체제의 마지막 – 마리아 1세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열아홉번째


주제 1세에게는 남성 후계자가 없었고 네명의 딸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네명의 딸들은 모두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주제 1세의 외할머니였던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네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으로 딸들의 이름에 모두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대공들이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포르투갈은 여성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나라였으며, 당연히 주제 1세에게 남성후계자가 없다면 여성이었던 장녀가 왕위계승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여성의 계승권리는 인정받았었지만, 여성이 직접 국왕으로 통치한 예는 없었습니다. 물론 명분상 여왕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있긴했지만 이들이 여왕으로 포르투갈을 통치한적은 한번도 없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주제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당시 16살이었던 장녀인 마리아 프란지스카 이자벨은 왕위계승자로 브라질 여공이자 브라간사 여공작 칭호를 받게 됩니다.      


인판타 마리아 프란지스카 이자벨,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


마리아 프란지스카 이자벨이 왕위계승자가 되면서 당연히 마리아의 남편감이 중요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왕가에서는 브라간사 가문이 계속해서 포르투갈 왕위를 가지고 있기 위해서 마리아 프란지스카 이자벨을 주제 1세의 동생이었던 페드루와 결혼시키려했습니다. 이 결혼에 대해서 당대 권력자였던 폼발 후작은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는데, 마리아와 페드루의 결혼은 그의 정적들을 더욱더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3세가 자신의 아들과 마리아의 결혼을 제안했을 때, 폼발 후작은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에 간섭하는 것이 더 문제일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마리아와 페드루가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습니다.      


페드루, 마리아 1세의 숙부이자 남편, 페드루 3세


1760년 마리아와 페드루는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는 여섯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특히 장남인 주제는 매우 똑똑했으며 폼발 후작의 영향을 받았었습니다. 그렇기에 폼발 후작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인 동 주제가 왕위계승자가 되길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폼발후작은 주제 1세가 죽기전, 동 주제가 자신의 이모였던 마리아 베네딕타와 결혼해서 성인으로 인정받길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왕위는 동 주제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에게 돌아갔습니다.     


브라질 공 주제, 마리아와 페드루의 장남


마리아는 1777년 아버지인 주제 1세가 사망한뒤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1세로 즉위합니다. 마리아의 남편이자 숙부였던 동 페드루 역시 아내와 함께 페드루 3세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페드루 3세는 정치에 별 뜻이 없었으며, 아내인 마리아 1세가 국정을 장악하게 됩니다.     


마리아 1세와 페드루 3세


마리아 1세는 즉위한 뒤 폼발 후작을 권력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마리아 1세는 자신을 지지해준 고위귀족들과 뜻을 같이 했으며 폼발 후작이 이전에 했던 많은 일들을 뒤집었습니다. 특히 타보라 사건을 다시 조사해서 타보라 가문이 무죄이며 폼발 후작이 이들을 잘못 판결한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사실 마리아 1세는 이전부터 폼발후작이 권력을 장악하고 휘두루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권신이었던 폼발 후작을 제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1세는 완전히 구체제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타보라 가문의 사건과 연결되어서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했던 예수회가 다시 돌아오려했을 때, 여왕은 신앙심이 깊었음에도 예수회가 돌아오는 것은 반대했습니다. 예수회에 대해서는 포르투갈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물론 교황청까지도 이들의 영향력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마리아 1세는 예수회를 돌아올수 있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왕은 비록 여왕의 지지세력의 미움을 받던 폼발 후작을 제거하긴 했지만, 폼발 후작이 추구했던 계몽주의식 개혁이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신하들을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계속해서 개혁을 추구했었기에 이들의 정책을 신폼발식 정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마리아 1세


마리아 1세는 폼발 후작의 영향력 때문에 사실상 왕위계승자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었습니다만 마리아 1세는 자신의 능력으로 국정을 장악하고 운영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 1세의 통치 초기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1780년대 중반 식민지 브라질의 경제가 더욱더 발전해서 본국인 포르투갈의 경제를 추월하는 것은 포르투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브라질 경제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것은 브라질 내의 불만을 강화시키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시기 마리아의 정신 상태는 점차 나빠지고 있었고 이런 상황은 아마도 마리아의 판단능력을 악화시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1786년 마리아 1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집니다. 그리고 1786년 5월 남편이 사망한뒤 마리아의 상태는 더욱더 악화됩니다. 마리아 1세는 점점 더 우울해졌으며 종교에 더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788년 기대하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주제가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마리아 1세의 우울증은 헤어나올수 없게 됩니다.     


결국 1792년 마리아1세는 정신 이상이라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마리아 1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은 이제 마리아 1세의 아들이자 형인 주제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가 된 주앙이었습니다. 물론 주앙은 1799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섭정이 되었지만, 어머니인 마리아 1세가 국정을 운영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미 정부를 운영하게 됩니다.     


주앙, 마리아의 둘째아들 이자 섭정, 후에 주앙 6세


마리아 1세는 이렇게 포르투갈의 정치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우연하게도 포르투갈은 물론 전 유럽을 혼란에 빠뜨리게 될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를 뒤바꾸는 큰 일이었으며, 포르투갈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해결해야했던 이는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해져서 주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던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인 주앙이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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