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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09. 2024

브라간사 가문 : 유럽의 전쟁 그리고 브라질로 이동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스무번째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 역사를 크게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후 여러 가지 근대적 개념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대 더 중요했던 것은 대혁명이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전쟁과 그 이후에도 이어지는 나폴레옹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전쟁이 일어나자, 유럽 대부분의 왕정 국가들은 당연히 국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만든 프랑스를 적대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프랑스 역시 혁명으로 인한 내부적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와 유럽 여러나라들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이익 때문에 결국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중 1794년 플뢰뤼스 전투


포르투갈 역시 당연히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포르투갈은 육지로는 에스파냐와만 국경이 맞닿아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오래도록 잉글랜드-영국의 동맹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럽의 왕정국가 대부분이 프랑스를 적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르투갈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이웃의 에스파냐와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과 함께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는 전 유럽에 전선을 두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천연경계론에 따라서 남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프랑스 영토의 경계선으로 규정지었으며 당연히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에스파냐가 그냥 있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프랑스 혁명 전쟁의 한 부분이었던 피레네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었던 포르투갈 역시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프랑스였기에 포르투갈의 위치가 애매해지게 됩니다. 에스파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1795년 바젤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의 승리를 확정짓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96년 에스파냐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기까지 합니다.     


1794년 블루전투, 이 전투에서 에스파냐-포르투갈 연합군은 프랑스에 패배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제일 곤란해진 쪽은 포르투갈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영국의 동맹이었는데, 영국은 바젤조약으로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을 거부하고 끝까지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포르투갈은 동맹인 영국과 이웃의 강대국인 에스파냐 그리고 유럽의 최강국으로 부상한 프랑스 공화국 사이에서 끼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대륙에서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눈치를 봐아했지만 해외식민지에서는 영국의 눈치를 봐야했기에 결국 두 세력 사이에서 끼인 상황이 되었으며 가까스로 중립적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나폴레옹 시대가 되면서 프랑스는 유럽의 최강국으로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으며, 에스파냐는 이런 프랑스의 동맹으로 이제 포르투갈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 남은 영국의 동맹들에 대해서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며 당연히 이들을 정벌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국경이 맞닿아있지 않았기에 명분이 빈약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에스파냐의 총리이자 권력자였던 고도이는 포르투갈을 장악해서 프랑스와 이익을 나누고 싶어했고, 포르투갈에 어느편에 설것인지를 강요하게 됩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은 마리아 1세였지만, 마리아 1세는 이미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정신적 문제가 컸고, 마리아 1세의 아들로 후계자이자 섭정이었던 주앙(후에 주앙 6세)가 국가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주앙은 편을 선택해야했을 때, 결국 영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결과 1801년 에스파냐와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침공하는 오렌지 전쟁 Guerra das Laranjas이 일어났으며 포르투갈을 패배하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1801년 6월 6일 바다호스 조약을 체결해서 포르투갈의 영토 일부를 에스파냐에 할양했었으며 영국의 모든 배를 포르투갈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에도 엄청난 배상금과 브라질의 상당 부분을 할양해야했다고도 합니다. 영국은 포르투갈의 항구를 쓰지 못하게 되자, 서둘러 포르투갈의 영토였던 마데이라 섬을 점령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2세의 흉상 앞에 있는 섭정 왕자 주앙, 후에 주앙 6


이후 복잡한 유럽 정세는 포르투갈의 상황은 더욱더 악화됩니다. 일련의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을 매우 약한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은 여전히 영국의 눈치를 봐야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중립을 유지하려했습니다. 당연히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이런 포르투갈을 고깝게 생각했고, 둘은 손을 잡고 포르투갈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포르투갈은 내부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주앙의 아내이자 에스파냐의 인판타였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정치적 야망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에스파냐 인판타로 당연히 남편이 에스파냐를 지지하길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주앙은 중립적 자세를 취했으며 이것은 당연히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불만을 가지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1806년 남편이 아픈 틈을 타서 자신의 섭정 지위를 차지할 음모를 꾸몄습니다만, 실행전 발각되었습니다. 주앙은 아내를 체포하면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을 잘 알았기에 아내를 연금시킨뒤 자신은 다른 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포르투갈의 주앙 6세의 아내


1806년 말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시행하면서, 상황은 더욱더 복잡하게 됩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경제적 이익 때문에 이 대륙봉쇄령을 지키지 않았으며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지키지 않은 나라들에 경고를 보냈습니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영국과의 무역을 계속했었고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더욱더 애매해지게 됩니다. 특히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무역은 포르투갈 경제에 큰 축으로 자리잡았을뿐만 아니라 영국의 이익에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은 또 한번 영국과 프랑스 사이를 선택해야할 시점이 오게 됩니다. 이때 포르투갈은 도저히 중립을 선택할 수가 없었는데, 이미 나폴레옹은 전쟁을 시작할 마음이 있었으며 또한 영국 역시 이익을 뺏기는 것을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결국 포르투갈이 어느 편을 정할지 미적대고 있는사이 영국과 프랑스 둘 다에게 공격당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1807년 10월 프랑스 군은 포르투갈을 향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포르투갈 왕가와 주요한 인물들에게 리스본이 함락되기전 피신하라고 권유합니다. 결국 포르투갈 왕가 전체와 중요한 궁전 조신들 상당수는 유럽의 전쟁과 멀리 떨어져있는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1807년 11월 16일 영국 함대가 포르투갈 왕가와 다른 사람들이 브라질로 가는 것을 호위하기 위해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1808년 1월 22일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에 도착합니다.      


리스본을 떠나는 포르투갈 왕가와 그 주변 사람들


포르투갈 왕가의 도피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왕국의 중요한 사람들 대부분이 도피한 포르투갈을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물론 아니었더라도 쉽게 점령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프랑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으며 또한 프랑스가 무거운 세금을 부여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프랑스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에스파냐 국왕을 폐위하고 자신의 형을 국왕으로 만든것에 대해서 에스파냐에서도 격렬하게 분개했으며 프랑스와 대적하게 됩니다. 결국 영국군이 이베리아 반도로 와서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반도전쟁이 일어났을 때 포르투갈은 물론 에스파냐도 영국과 함께 프랑스에 대항해서 싸웠으며, 결국 프랑스 군은 여기서 패배하게 됩니다.      


주앙은 브라질로 떠나기전에 왕가가 떠나야하는 당위성을 밝혔지만, 포르투갈에 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가와 고위층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달아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포르투갈 사람들 중에는 왕가에 대한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또한 자신들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브라질에서 편안하게 산 왕가 사람들에 불만을 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포르투갈 내 자유주의자들의 힘을 더욱더 키우게 되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복잡해지는 포르투갈 왕가의 내부분열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을 것입니다.     


떠나는 포르투갈 왕가 사람들


본국 포르투갈의 상황이 복잡했던 반면 이제 포르투갈 왕가의 거주지로 식민지에서 중심 역할을 하게 된 브라질은 포르투갈과 다른 상황이 됩니다. 브라질의 위상은 올라가게 되었으며 또한 리우데자네이로는 이제 포르투갈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역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뒤 브라질과 포르투갈 본국과의 정치적 갈등에 한몫하게 됩니다.


브라질에 도착한  포르투갈 왕가 사람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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