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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16. 2024

브라간사 가문 : 주앙 6세- 브라질과 포르투갈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스물한번째

왕가가 브라질로 이동한 것은 브라질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브라질은 이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다른 해외와의 직접적 교역이 불가능했습니다. 본국인 포르투갈을 통해서만 가능했었죠. 하지만 이제 왕가가 이동했으며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가 포르투갈의 실질적 수도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브라질이 다른 국가들과의 직접무역등이 가능해졌으며 이것은 브라질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행정부가 옮겨왔기에 당연히 이전의 브라질의 행정 시스템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행정 시스템 역시 발달하게 됩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행정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당연히 브라질내의 사람들의 인식 역시 점차 바뀌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저 본국에 종속된 것을 받아들이고 살았다면, 이제는 브라질이 본국인 포르투갈의 역할을 대신 수행했던 것을 바탕으로 자신들 역시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인정받길 원하게 됩니다.      


섭정 왕자 주랑에 대한 찬양,1810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이제 포르투갈 왕가는 사실 브라질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섭정이었던 주앙은 포르투갈 왕가가 본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브라질에 남았으며, 1815년 브라질의 지위를 식민지가 아닌 본국인 포르투갈과 동등한 지위까지 끌어올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제 브라질은 본국인 포르투갈과 동등한 지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브라질에서는 독립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 왕가가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브라질에는 유럽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직접적으로 전해졌으며 당연히 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 사상과 네셔널리즘의 사상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브라질 사람들이 점차 브라질의 독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주앙 6세는 이를 억누르려했으며 이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중 하나가 브라질의 지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브라질 내에서 독립의 열망이 점차 더 높아졌으며 브라질 내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1816년 마리아 1세가 사망하고 오래도록 섭정역할을 했던 주앙이 결국 주앙 6세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복잡한 정치 상황에 맞닥들이게 됩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는 자유주의 사상이 퍼져나갔으며 입헌군주제에 대한 열망이 커져가게 됩니다. 빈회의는 모든 것을 나폴레옹 전쟁 이전시대로 돌리려는 노력이었지만, 이미 퍼져나간 사상을 억제할 수는 없었으며 유럽에서 다양한 자유주의적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포르투갈도 포함되었습니다. 1820년 포르투갈에서는 입헌주의를 요구하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목적도 있었지만, 경제적 문제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면서 포르투갈의 이익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당연히 불만을 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때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입헌주의 뿐만 아니라 왕가의 포르투갈 복귀, 브라질의 지위 축소등을 요구했습니다.     


포르투갈 최초의 헌법 승인


주앙 6세는 포르투갈에서 혁명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는 왕가가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앙 6세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포르투갈로 돌아가려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브라질쪽에서 반발합니다. 포르투갈의 요구중에는 브라질의 권리를 축소하고 다시 식민지 지위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앙 6세가 돌아가는 것은 브라질의 권리를 다시 축소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앙 6세는 포르투갈을 잃을수는 없었을뿐만 아니라 브라질도 달래야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은 떠나지만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드루를 섭정으로 남겨두게 됩니다. 1821년 주앙 6세는 이제 브라질의 섭정이 된 페드루와 그의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왕실 가족들과 함께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앙 6세와 그의 가족들의 포르투갈 귀환


포르투갈에서 자유주의적 혁명이 일어났기에 당연히 헌법을 인정하고 의회를 구성해야했습니다. 브라질에서도 당연히 대표를 뽑아서 의회에 의원들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포르투갈내에서는 여전히 브라질을 동등한 지위의 지역이 아닌 식민지로만 봤으며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당연히 브라질에서는 이에 대해서 반발하게 됩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이 갈등을 빚게 되면서 왕가의 입장은 난처하게 됩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브라질에 남아있던 왕위계승자인 페드루도 이제 귀환하라고 촉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브라질 입장에서는 섭정마저 떠난다면 브라질이 이전 지위로 돌아갈수 있을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결국 브라질 사람들의 입장에 동조하던 페드루는 포르투갈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브라질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갈등이 더욱더 심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브라질에서는 브라질에 남은 포르투갈 군대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포르투갈에서는 페드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왕위계승권리를 박탕하겠다고 선언합니다. 1822년 9월 이런 소식을 들은 페드루는 “독립인가 죽음인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는데, 결국 페드루와 브라질은 독립을 선택합니다. 브라질은 제국으로 선언했으며 섭정이었던 페드루는 이제 황제 페드루 1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25년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됩니다.      

동 페드루,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1822년경


주앙 6세는 아마 아들인 페드루가 브라질의 독립을 지지하고 황제가 된 것에 매우 화가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아들인 미겔 역시 그에게 충성스러운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했던 무렵 포르투갈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전의 체제인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주앙 6세는 자유주의가 우세한 포르투갈의 상황에 순응했었습니다만, 주앙 6세의 아내인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이를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으며 막내아들인 미겔과 함께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서 다시 이전의 절대주의적 통치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미겔은 아버지를 붙잡아서 양위를 강요하려했습니다만 주앙 6세는 영국의 도움으로 무사했고 미겔과 아내인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미겔을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인 카를로타 호아키나를 연금시켰습니다.     


미겔


주앙 6세는 점차 건강이 나빠졌지만 그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 둘 모두가 그에게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내에서나 주앙 6세 개인적으로도 장남인 페드루가 더 왕위계승자로 적합해보였습니다. 비록 브라질의 독립을 이끌었고 브라질의 황제가 되었지만 페드루는 자유주의자였기에 보수주의자로 반란을 일으켰던 미겔보다는 훨씬 더 좋은 선택지였습니다. 게다가 페드루는 브라질을 통치하고 있었기에 페드루가 다시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두 나라는 다시 연합왕국형태로 돌아갈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독립을 승인하는 문서에서 페드루의 포르투갈 왕위계승 배제 조항을 넣지 않았으며 암묵적으로 페드루가 포르투갈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1826년 3월 주앙 6세는 사망합니다. 그는 죽기전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를 후계자로 인정했고 페드루가 돌아올때까지 딸인 이자벨 마리아가 포르투갈의 섭정으로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주앙 6세의 죽음은 이제 포르투갈을 내전의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는 시초가 됩니다.


주앙 6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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