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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r 15. 2024

브라간사 가문 : 마리아 2세 –입헌 시대의 시작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스물세번째


1834년 마리아2세는 아버지 브라간사 공작 페드루에 의해서 다시 왕위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같은해 마리아 2세의 아버지인 브라간사 공작이 사망했으며 이제 마리아 2세는 국왕으로 포르투갈을 통치해야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2세는 이미 이전부터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2세, 1829년


비록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군주로 마리아 2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2세가 복위한 직후부터 남편감을 찾았습니다. 이전에 마리아 2세는 숙부였던 미겔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만, 미겔이 마리아를 쫓아내고 왕위를 강탈했었기에 당연히 미겔과의 약혼도 없었던 일이 됩니다. 마리아 2세의 아버지인 브라간사 공작은 죽어가고 있을 때 딸의 남편감을 서둘러 찾아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후계자 문제도 있었을뿐만 아니라 죽기전 겨우 15살인 딸에게 남편감을 찾아줘서 혹시나 포르투갈에서 또다른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이 될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페드루가 선택한 인물은 바로 자신의 처남었던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였습니다.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는 바로 외젠 드 보아르네와 그의 아내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의 아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외젠은 장인의 도움으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 되었고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뮌헨에서 살았었습니다. 외젠의 자녀들은 바이에른 왕가의 일원으로 대접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아우구스트의 동생인 아멜리는 1829년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고, 아우구스트는 이런 동생을 따라서 브라질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페드루 1세는 능력있는 인물이었던 처남을 눈여겨봤으며 결국 딸과 아우구스트를 결혼시키기로 했던 것입니다.     


1834년 12월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는 뮌헨에서 마리아 2세와 대리결혼을 한뒤, 1835년 1월 26일 리스본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결혼 두달후인 3월 28일 아우구스트는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독살당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고 합니다만 그냥 소문일 뿐이었습니다.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 마리아 2세의 첫번째 남편, 외젠 드 보아르네의 아들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마리아 2세는 곧 남편감을 다시 선택해야했습니다. 그리고 찾은 인물은 바로 작센-코부르크-코하리의 페르디난트였습니다. 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헝가리쪽 분가 사람으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1세의 조카이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사촌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포르투갈에서는 이런 그의 친척관계를 고려해서 마리아 2세의 남편감으로 선택했을 것입니다. 1836년 1월 1일 페르디난트는 대리결혼을 한뒤 1836년 4월 9일 리스본에서 마리아 2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페르디난트는 포르투갈에서 동 페르난도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첫아이이자 후계자가 태어난 1837년 9월 16일 이후 아내와 함께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이 되었고 이후 포르투갈의 페르난도 2세가 됩니다.    

 

페르난도 2세가 비록 국왕이 되었지만, 포르투갈에서는 마리아 2세에 의해서 브라간사 가문이 이어질것이라고 선언했으며 이 때문에 포르투갈에서는 왕가의 이름을 페르난도 2세의 가문인 작센-코부르크-코하리 가문이 아니라 브라간사라는 이름 그대로 이어받게 됩니다.    


작센-코부르크-코하리의 페르디난트, 포르투갈의 페르난도 2세, 마리아 2세의 남편


  


마리아 2세의 통치 시기는 사실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비록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마리아 2세쪽 사람들이 승리를 거뒀지만, 여전히 포르투갈내에서는 미겔을 지지하던 보수주의자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웃의 에스파냐에서도 포르투갈처럼 조카와 숙부가 각각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지지로 나뉘어서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도 조카인 이사벨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이에 반발해서 내전을 벌였고 이것은 당연히 포르투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 내에서도 온건한 측과 급진적인 측으로 나뉘어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2세의 통치 초기 혼란은 급진적 자유주의자들과 온건적 자유주의자들의 대립에서 발생했습니다. 마리아 2세 시기에는 마리아 2세의 아버지인 페드루가 만든 1826년 헌법이 통과되었습니다만, 이 헌법의 내용에 대해서 사람들간의 이견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제적 상황도 문제가 되는데 헌법에서 지향하는 자유무역과 자유경제주의 원칙에 대한 결과가 신통치 않았으며 특히 일부 계층의 부의 집중으로 이어졌기에 더욱더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결국 1836년 9월 포르투갈에서는 사람들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당시 헌법에 반대해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군부는 처음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이후에 혁명을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마리아 2세와 정부는 이를 손쓸수 없이 이들의 주장을 수용해야만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2세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서 외국 세력과 손을 잡으려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세력은 바로 벨기에였습니다. 벨기에는 포르투갈의 남은 아프리카쪽에 관심이 많았으며 또한 마리아 2세의 남편인 페르난도는 벨기에 국왕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2세는 벨기에외에도 또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고 싶어합니다. 바로 포르투갈의 전통적 동맹이었던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부부 모두는 마리아 2세의 남편인 페르난도의 사촌이었기에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 2세 부부는 외국 세력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하려했지만, 리스본 사람들은 여왕의 이런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외국 세력의 개입을 거부합니다. 특히 군부가 여왕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외국군이 포르투갈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결국 마리아 2세는 혁명을 수용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벨렌사다Belenzada라고 불리게 됩니다.  

   

1826년 헌법과 포르투갈 왕실 가족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이후로도 지속되는 포르투갈의 내분의 시작이었습니다. 마리아 2세는 여전히 1826년 헌법을 지지했으며, 이런 마리아 2세와 1826년 헌법을 지지하는 인물들인 카르치스타Cartista와 1826년 헌법보다 더 급진적인 방식을 지지했기에 1836년 9월의 혁명을 일으켰던 세력인 세텡브리스타Setembrista 그리고 남아있던 미겔을 지지하던 보수주의자들인 미겔리스트들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주로 카르치스타와 세텡브리스타 둘의 대결이 지배적이었지만, 1840년대 들어서면서 미겔리스트들 역시 이들 둘의 갈등에 동참하게 됩니다.     


1842년 마리아 2세의 최측근이었던 토마르 후작 안토니우 베르나르도 다 코스타 카발리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카르치스타들의 지지를 얻어서 1826년 헌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당연히 세텡브리스타들은 이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이후 1846년 지속된 정치적 혼란 뿐만 아니라 재정문제의 악화와 이전에 따르고 있던 많은 법률의 변화에 불만을 품은 지방의 사람들이 주축으로 된 “마리아 다 폰테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초기 지도자가 마리아 라는 이름의 여성이라고 알려져있었기 때문인데 여성의 이름이 붙은 것은 여성들이 이 혁명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으며 아마도 그만큼 경제적 상황이 힘들었기 때문으로 추측할수 있습니다. 이 혁명은 이후 파툴레이아Patuleia라고 불리는 내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내전은 카르치스타들과 세텡브리스타 그리고 남은 미겔리스트들이 함께 싸웠는데, 정권을 잡은 카르치스타들에 대항해서 이념이 정 반대인 세텡브리스타와 미겔리스트들이 손을 잡고 싸웠다고 합니다. 내전은 결국 영국등이 개입해서야 끝났는데, 정권을 잡은 카르치스타들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마리아 2세는 사실 통치기 내내 아이를 낳았습니다. 1837년 9월 첫 아이자 후계자인 페드루를 낳은뒤 이후 거의 매년 아이를 낳았습니다. 여왕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후계자를 낳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지속적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첫임신부터 매우 힘들었으며 여왕의 잦은 임신은 점차 여왕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의사들은 여왕에게 임신하는 것은 목숨이 위험할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여왕은 죽어야한다면 내 지위에서 죽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1853년 11월 15일 여왕은 11번째 아이를 사산하고 34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장남인 페드루를 안고 있는 마리아 2세



마리아 2세가 죽은뒤 왕위는 장남인 페드루에게 이어져서 페드루 5세가 됩니다. 마리아 2세의 남편으로 아내와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이었던 페르난도 2세는 사실 이전부터 정치에 관여하려하지 않았으며 아내가 죽자 역시 아들을 위해서 퇴위했습니다.     


페르난도 2세, 페르난도 2세는 나이들면 진짜 벨기에쪽 사촌인 레오폴 2세랑 정말 비슷한 느낌이더라구요.


마리아 2세는 입헌군주였으며 또한 통치기 내내 아이들을 낳았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왕은 정치적으로 그다지 부각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여왕의 남편이었던 페드난도 2세 역시 초기 정치적 실패를 겪은후 이후에는 절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왕이 초기부터 카르치스타들과 뜻을 같이하고 이들이 계속해서 권력을 잡을수 있었던 것은 여왕이 정치에 아주 무관심하거나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은 아닐듯합니다.


마리아 2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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