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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pr 05. 2024

브라간사 가문 : 카를로스 1세와 마누엘 2세-왕정의끝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스물다섯번째

카를로스 1세는 루이스 1세의 장남으로 당연히 후계자로 교육받았으며 그는 입헌 군주 국가의 수장인 입헌 군주로 통치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왕위에 오르기전 유럽의 다른 여러 국가들을 방문해서 포르투갈보다 훨씬더 기술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봤으며 포르투갈에도 이를 도입하려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국왕이 된 뒤 포르투갈에 전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했었습니다. 비록 현대화에 전기가 꼭 필요했던 것을 생각하면 포르투갈의 앞날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당대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를 그저 돈이 많이 드는 국왕의 이상한 사업으로 여겼고, 도리어 국왕의 인기를 떨어뜨린 요인중 하나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기술인 사긴에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카를로스 1세는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여러 작품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조류학에 열정적이었으며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해양학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해양학을 위한 요트를 구입하기도 했고, 역시 해양학에 관심이 많았던 모나코의 알베르 1세와 교류를 하면서 모나코 해양 박물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바스코 다 가마 아쿠아리움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농업에도 관심이 많아서 왕실 영지에서 여러 수익성 작물을 심어서 와인,올리브유,코르크등을 생산했으며, 또한 가축농장을 만들고 종마를 보존하는 일도 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1세, 젊은 시절

   


이렇게 개인적으로 보면 카를로스1 세는 괜찮은 군주였지만, 그의 삶은 당시 내리막으로 내려가던 포르투갈의 상황과 맞물려서 매우 어려웠습니다.     


1889년 카를로스 1세가 즉위했을 때 포르투갈의 상황은 점차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프리카 식민지 문제 때문에 영국과 마찰이 극심했었고 결국 영국은 최후통첩을 하면서 포르투갈은 결국 자신들이 주장하던 아프리카쪽 식민지를 포기해야했습니다. 사실 포르투갈이 영국과 이곳에서 싸우는 것은 당시 상황상 이길수가 없었으며 또한 오랜 동맹이었던 영국과 척을 지는 것은 당연히 포르투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식민지라고 할지라도 영토를 순순히 양보하는 것은 국민 감정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으며 특히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국왕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1890년 일어난 불황상태였던 베어링위기the Baring Crisis는 포르투갈 경제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의 베어링 은행이 아르헨티나 투자에 대한 과도한 위험 부담을 떠안았고 그 결과 1890년 11월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를렀고, 결국 영국에서는 구제금융을 통해서 파산을 막고 은행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여파를 최소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이에 대한 여파가 컸는데 특히 브라질과 포르투갈 모두 타격을 입게 됩니다. 베어링 위기는 아르헨티나와 연결되었지만, 같은 지역이었던 브라질에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역시 재정 상황이 나빠지고 있던 포르투갈에도 큰 영향을 줬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은 국채를 갚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1892년과 1902년 국가 파산을 선언했었습니다.      


카를로스 1


당연히 영토 문제와 경제 상황의 악화는 정부와 국왕에 대한 신임을 더욱더 악화시켰습니다. 특히 카를로스 1세는 주앙 프랑코에게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습니다만, 프랑코의 정부는 좀 더 권위주의적이 되어서 사회 불만을 억압하려했기에 사람들의 불만은 더욱더 커져갔으며 의회를 해산하고 이런 프랑코에게 정권을 준 국왕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주앙 프랑코, 카를로스 1세가 망상당할때 당시 포르투갈 총리


결국 1908년 2월 1일 카를로스 1세와 왕비 그리고 두 아들은 마차를 타고 리스본 거리를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왕실 가족을 호위하는 사람들은 두명의 기마 장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리를 지나는 동안 국왕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암살자가 국왕과 그 가족을 향해서 총을 쐈습니다. 국왕은 즉사했고, 후계자인 루이스 필리페는 치명상을 입고 얼마뒤 사망했으며, 막내아들인 마누엘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카를로스 1세와 그의 후계자가 사망했고 살아남은 아들인 마누엘이 마누엘 2세로 즉위했습니다.     


리스본 암살 사건


마누엘 2세는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아내인 오를레앙의 아말리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후계자인 형인 루이스 필리페가 있었기에 군주로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국왕과 후계자를 암살할 정도로 포르투갈 상황은 악화되었었는데 군주로 교육받지 못한 마누엘 2세가 즉위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더 차가워졌습니다.

마누엘 2세

물론 마누엘 2세는 아버지의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주앙 프랑코와 그의 정부를 해산하고 좀 더 노련한 정치가인 주제 루치아노 데 카를로에게 정부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욱더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완전한 상징적 존재로 남기로 했습니다. 또한 군주제에 대한 인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전 포르투갈을 방문했고 젊은 국왕을 만난 많은 사람들이 국왕에 대해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마누엘은 그저 싫어하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의식후 마누엘 2세와 사람들


마누엘 2세가 즉위했던 시기는 이미 포르투갈의 기존의 정치 체제가 지탱하기 힘들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마누엘 2세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1세 역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앙 프랑코에게 정부를 맡기는 등의 일을 했지만 결국 그의 암살로 끝났었습니다. 마누엘 2세 시기도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정했고 결국 1910년 10월 5일 리스본에서 공화국 혁명이 일어납니다. 결국 마누엘 2세는 왕실 가족들과 함께 요트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포르투갈에서 왕정은 끝나게 됩니다.      


망명후, 영국에서 가터 로브를 입은 마누엘 2세



이렇게 이제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으며,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가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1910년 이후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으며 국왕이나 왕가와는 관계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2세기 아폰수 1세가 독립한 포르투갈의 첫 번째 국왕이 된 이래 거의 800여년간 포르투갈은 왕국으로 국왕의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19세기 포르투갈이 입헌군주국이 되면서 국왕의 존재가 좀 더 미약해졌습니다만, 이전의 700여년간은 국왕이 모든 것을 통치했었으며 국왕과 왕실은 포르투갈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을 통치한 왕가를 살펴보는 것은 포르투갈의 역사를 이해하는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르투갈 국기


이 글의 주요 참고 문헌은 A History of Portugal and the Portuguese Empire : From Beginnings to 1807 (A.R.Disney,Cambridg University Press,2009)입니다. 책 제목대로 1807년까지만 나와있는데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포르투갈 왕가가 브라질로 떠나면서 포르투갈 제국이 완전히 흔들리게 되는 것이 1807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후 이야기는 A new history of Portugal( H.V.Livermoer,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를 참조했습니다. 그 외에도 늘 참조하는 영문 위키&포르투갈어 위키(구글 영문번역) 참조했으며 브라질 파트는 브라질의 역사 (보리스 파우스투/최해성,그린비,2012)를 참조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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