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Mar 29. 2024

브라간사 가문 : 페드루 5세와 루이스 1세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스물네번째

1853년 마리아 2세가 사망한뒤 왕위는 마리아 2세의 장남인 16살의 페드루 5세가 물려받게 됩니다. 페드루 5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섭정이 필요했고 섭정으로는 페드루 5세의 아버지이자 아내가 죽은뒤 퇴위한 페르난도 2세가 담당했었습니다.      


페르난도 2세는 정치적 역할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단지 사회사업과 아이들의 교육에 집중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뒤에 아들의 섭정으로 일했지만 역시나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경제사회적 문제에 더 집중했으며, 아버지의 지도를 받은 페드루 5세는 포르투갈의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매우 성실하게 일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페드루 5세는 특히 포르투갈 국가 시설의 현대화에 집중했는데 철도등의 기반 시설은 물론 콜레라 같은 전염병을 막기 위한 노력을 했었습니다. 페드루 5세는 국왕으로 겸손했으며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했고 의무가 최우선이기에 일을 열심히하는 인물이었고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됩니다.


     

페드루5새


사실 이미 입헌시대에 접어들었기에 국정은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담당했으며 국왕은 점차 더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페드루 5세 역시 정치적으로 완전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는데 이를테면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살다나 공작을 총리직에서 해임하고 해외 대사로 보내서 포르투갈 정치에서 배제하는 일등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페드루 5세는 1858년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스테파니와 결혼을 합니다. 사실 페드루 5세와 가족들은 친척이자 강력한 동맹자가 될수 있는 영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고 싶어했었습니다만,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대신에 스테파니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페드루 5세는 처음에는 이 혼담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페드루 5세는 곧 스테파니에게 반했으며 둘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결혼 1년여만에 스테파니는 디프테리아에 걸려서 사망합니다. 아내를 잃은 페드루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계속해서 미혼으로 지냈으며 심지어 그는 죽은 아내에 대한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일을 과중하게 했다고도 합니다.      


페드루 5세와 에스테파니아 왕비


1861년 포르투갈 왕가에서는 전염병이 돌았는데 1861년 11월 6일 먼저 페드루 5세의 동생인 페르난도가 사망했고, 1861년 11월 11일에는 국왕인 페드루 5세가 사망합니다. 그리고 다음달인 12월 27일에는 또다른 동생인 주앙이 사망했습니다. 사랑받던 국왕의 죽음에 포르투갈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독살당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고 합니다.     


페드루 5세


페드루 5세가 죽은뒤 왕위는 그의 동생인 루이스가 이어받게 됩니다. 루이스는 어려서부터 해군으로 교육받고 일했었습니다. 그는 형이 국왕으로 있는 동안 해군으로 여러 가지 임무를 맡아서 바다로 나갔었습니다. 하지만 형인 페드루 5세가 사망하자 결국 포르투갈의 국왕 루이스 1세가 됩니다.     


형 페드루 5세와 함께 있는 루이스 1세


루이스 1세는 형제들중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인물이며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작곡하고 악기를 연주했었으며, 또한 여러 언어에도 재능이 있었기에 번역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에서 루이스 1세의  번역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햄릿이라고 합니다.      


루이스 1세


루이스 1세는 어머니나 형보다 더 정치에 덜 개입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포르투갈내 여러 정당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물론, 포르투갈이 공화국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공화주의자의 정당이 포르투갈 내에서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루이스 1세의 통치기는 형인 페드루 5세 통치기보다 더 평가가 나빴는데 아마 가장 큰 이유는 형보다 통치기가 길었던 것이 주요했을 것입니다. 페드루 5세 시기는 인프라를 만드는 것을 시작하는 시기였지만, 루이스 1세의 시기는 이런 인플라를 계속해서 만들어가야하는 시기였습니다. 문제는 이 시기 포르투갈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결국 포르투갈의 현대화가 점차 늦어지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다시 포르투갈의 여러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의 남은 식민지에 대한 영유권 역시 문제가 되는데 특히 아프리카 식민지에 영유권에 대해서 다른 강대국들, 특히 전통적 우방이었던 영국과의 관계가 미묘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루이스 1세


루이스 1세가 즉위했을 때 남은 남동생인 아우구스토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서둘러 결혼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루이스 1세는 즉위한 다음해인 1862년 사보이의 마리아 피아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는 두 아들인 카를로스와 아폰수가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피아는 왕비로 매우 자비심이 강했으며 또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사회사업에는 집중했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부부는 처음에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루이스 1세가 곧 수많은 다른 여성들과 연애질 하면서 마리아 피아는 결혼생활에 대해서 우울해했으며 또한 시누이인 마리아 안토니아와의 관계가 매우 나빴다고도 합니다.     


루이스 1세와 마리아 피아 왕비


1889년 루이스 1세가 사망하고 루이스 1세의 아들인 카를로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

이전 23화 브라간사 가문 : 마리아 2세 –입헌 시대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