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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r 08. 2024

브라간사 가문 : 페드루 4세와 미겔 1세 그리고 내전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스물두번째

주앙 6세가 죽자, 포르투갈에서는 브라질에 있는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왕위를 잇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는 자신이 포르투갈 왕위를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브라질에서 그가 포르투갈의 국왕을 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브라질은 여전히 포르투갈과 다시 묶일 경우 식민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했으며 그것을 용납할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페드루 1세는 잠시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로 불리게 되지만 곧 포르투갈의 왕위를 장녀인 마리아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브라질의 황제로만 남기로 합니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4세


페드루는 멀리 브라질에 있었지만, 아마도 포르투갈의 왕위를 잇는 것에 대해서 가문의 입장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딸이 포르투갈의 여왕이 되면, 포르투갈의 왕가는 딸의 남편 가문으로 바뀌는 것이고 결국 이것은 브라간사 가문이 포르투갈을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페드루 역시 이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마도 그는 부모처럼 딸을 추방당한 동생인 미겔과 결혼시켜서 포르투갈을 계속 브라간사 가문이 통치할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페드루의 딸인 마리아는 미성년자로 섭정이 필요한 나이였으며 동생인 미겔이 섭정을 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미겔은 보수주의자였기에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페드루와 포르투갈의 사람들은 미겔의 보수주의적 성향을 걱정했습니다. 그렇기에 페드루는 동생에게 헌법을 준수하는등 자유주의적 성향을 따르면 미성년인 마리아가 성장하는 동안 섭정으로 지낼수 있으며 이후 마리아와 결혼한 뒤에는 여왕의 남편으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될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미겔은 당연히 이 조건을 수락했으며 곧 포르투갈로 돌아갈수 있게 됩니다. 1828년 2월 미겔은 리스본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조카의 약혼자이자 섭정으로 포르투갈을 통치할 권리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미겔은 보수주의를 지지했으며 입헌군주가 되겠다는 형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절대 군주로 포르투갈을 통치하길 원했습니다. 결국 1828년 6월 미겔은 조카인 마리아 2세로부터 왕위를 뺏고 스스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됩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절대군주제를 시행하게 됩니다. 포르투갈내 자유주의자들은 갈곳이 없어서 밀려났지만 결국 아조레스 제도의 섬 중 테르세이라 섬에 겨우 발붙일수있었습니다.     


미겔 1세


사실 미겔이 왕위를 뺏을 때 마리아는 포르투갈에 없었습니다. 마리아 역시 브라질에서 포르투갈로 오고 있었는데 유럽에 있던 미겔이 더 빨리 포르투갈에 온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일행들은 뒤늦게 유럽에 도착해서 포르투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 2세의 주변 인물들은 마리아 2세를 오랜 동맹인 영국으로 데려갔습니다만 영국측에서는 미겔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특히 영국에서 명성이 컸던 웰링턴 공작은 대놓고 미겔을 지지했었으며 영국 역시 마리아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되찾는 것을 원치 않는듯한 행동을 했었습니다. 결국 마리아 2세는 1829년 새어머니가 될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말리를 만나러 갔으며 이후 새어머니와 함께 브라질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 2세, 1829


이렇게 미겔이 완전히 포르투갈을 장악하는 듯보였습니다. 아조레스 제도의 섬 한곳만 점령한다면 포르투갈은 완전히 미겔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문제가 발생합니다. 비록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미겔을 지지하기도 했었지만 자유주의를 심하게 억압하는 미겔은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기에 정부에서 미겔에 대해서 호의적이라고 하더라도 섣불리 미겔을 지지한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조레스 섬에 있는 자유주의자 망명 정부와 그 군대는 여전히 마리아 2세를 지지했으며 이들은 이제 조금씩 세력을 넓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1831년에는 아조레스 제도 전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명의 원군이 오게 됩니다. 바로 마리아 2세의 아버지이자 전 포르투갈의 국왕이었으며 브라질의 황제였던 페드루 1세였습니다.      


페드루 1세는 브라질내에서 복잡한 정치 상황에 맞닥들였으며 결국 브라질내에서 지지를 잃게 됩니다. 브라질에서 페드루 1세의 인기는 점차 시들해져갔으며 특히 아내인 마리아 레오폴디나 여대공을 홀대한 것이 더욱더 인기를 잃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보다 정부였던 도미틸랴를 더 대접했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남편보다 인기가 많았던 황후가 굴욕당하는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졌습니다. 특히 황후가 죽고 난뒤 많은 이들이 황제가 황후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을 정도였으며 이것은 안그래도 정치적 문제로 인기가 떨어져가던 페드루 1세에게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결국 1831년 페드루 1세는 아들인 페드루 2세에게 브라질 황위를 양위하고는 아내와 딸인 마리아 2세만을 데리고 브라질을 떠나서 유럽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스스로를 브라간사 공작이라고 칭하면서 딸인 마리아 2세가 다시 포르투갈 왕위를 되찾기 위해 군사적 투쟁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2세와 다른 가족들을 파리에 남겨두고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마리아 2세를 지지하면서 끝까지 남아있는 자유주의자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아조레스 제도로 갔습니다.      

브라질의 페드루 1세의 양위

아조레스 제도에서 페드루는 이제 포르투갈 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1832년 7월 브라간사 공작이 이끄는 자유주의 군대가 포르투 인근에 상륙했으며 곧 포르투로 진격하게 됩니다. 미겔측 군대는 포르투를 버리고 떠났기에 브라간사 공작의 군대는 포르투를 장악합니다만 이후 이들은 포르투에 포위된 신세가 됩니다. 포위는 거의 1년간 지속되었는데 이동안 브라간사 공작은 다른 병사들과 함께 싸웠으며 이들과 함께 참호를 파고 식사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오랜 포위생활로 인해서 물거품이 될뻔했습니다만, 브라간사 공작쪽 사람들이 일부 영국등의 지원을 얻어서 리스본을 직접 공격했고 리스본은 곧 함락합니다. 이후 전쟁은 브라간사 공작측에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이웃의 에스파냐의 카를리스트 전쟁이 일어나면서 포르투갈의 상황은 혼란해집니다.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 7세가 가문의 상속법인 살리카법을 무시하고 법을 바꿔서 딸인 이사벨을 왕위에 올렸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와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인 카를리스트들이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것도 사실 이사벨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몰리냐 백작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대결구도였기에 브라간사 공작은 에스파냐쪽 자유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 카를리스트들과 미겔의 지지자들을 물리쳤습니다. 결국 미겔은 쫓겨났고 1834년 5월 마리아 2세는 다시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선포됩니다.     


브라간사 공작 페드루


브라간사 공작 페드루는 전쟁중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게다가 브라질에 남겨두고 왔던 자녀들을 걱정했었는데 허약했던 딸 파울라가 1833년 죽었다는 소식 역시 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서 페드루 역시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결국 1834년 9월 사망했습니다.     


페드루가 죽은뒤 마리아 2세는 포르투갈로 돌아왔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와 결혼해서 포르투갈을 통치하게 됩니다. 반면 미겔은 형에게 쫓겨 난뒤 독일로 가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평생 포르투갈로 돌아오지는 못했습니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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