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앤드류를 만나는 일은 내 계획에도 없었고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싱가폴에 가면 호주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러나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다.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도 여전히 꿈같은 일이.
앤드류는 호주 사람이고 싱가폴로 여행을 왔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야 했고, 그날이 곧 다가왔다. 며칠 안되는 시간 짧게 만났지만, 나는 그와 친해졌고 또 우리 사이는 다정했다. 오늘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네, 했던 날, 그는 내게 아침부터 톡을 보내왔더랬다.
I want to see youuu!
나는 그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MRT 역으로 그를 데리러 나가서는 집으로 향하며 '한국 음식을 준비했어' 라고 했지만, 그러나 사실 내가 크게 준비한 건 없었다. 아침에 밥을 좀 해뒀고, 밀키트로 떡볶이를 했다. 냉동식품 만두를 전자렌지에 데워두었고. 사실 앤드류와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하면서 나름 머릿속에 카레도 하고 잡채도 하고 막 생각들이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장보고 나니 그런 음식들을 준비할 시간이 안되는거다. 하는수없이 시간이 걸리진 않지만 한국음식인 것을 준비하기로 햇고, 그것이 떡볶이랑 만두였다.
접시가 더 없어서 떡볶이는 냄비째 그대로 두었다.
앤드류는 밥을 접시에 덜어서 떡볶이랑 슥슥, 비벼 잘도 먹었다. 맛있다고 했다.
와인도 있고 맥주도 있고 물도 있어, 뭐 마실래? 물으니 맥주를 마시겠다해서 앤드류에게는 맥주를 주고 나는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만났던 일에 대해 그리고 각자의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창문 앞으로 가서 창밖을 보며 얘기하기도 했다. 수영장이 보여 수영장 얘기를, 테니스 코트가 보여 테니스 얘기를 했다. 운동을 해서 더 강해지고 싶다는 얘기를 그가 했고, 나는 전완근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고 얘기했다. 앤드류는 인터레스팅 하다면서, 보는 걸 좋아하는 거야 만지는 걸 좋아하는거야? 물어서 나는 둘 다 라고 답했다. 그는 빵터져서 웃었다. 하하하하하.
싱가폴에 오기전, 내게는 한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 해결을 위해 열심히 뛰었고 그렇지만 결과를 보지 못한채 싱가폴로 와야했다.
어떤 날은 울었고 어떤 날은 주저 앉았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도 했고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뒷일을 동생들에게 부탁하고 싱가폴에 와서도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싱가폴에 오니 현지 전화번호를 받는 일도 집을 구하는 일도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이른 아침 도착해 저녁때까지 집을 보러 다니고 문제를 해결하러 다니고 그러다가 호텔에 돌아와서는 다시 다른 집을 찾아보고 뷰잉 예약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간 집을 보고 마음에 들어 계약하고 싶다고 말해두고 한시름 놓았던거다.
집을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긴 햇지만, 학생비자가 나오질 않아 언제 입주가 가능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입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해두고, 며칠을 또 호텔을 잡아야 했다. 나는 이제 싱가폴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 여행때처럼 좋은 호텔을 고집할 순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저렴한 호텔을 찾아 예약했고, 그렇게 옮겨간 첫날, 그날 밤 로비에서 앤드류를 만난거다.
우리는 그 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만나서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이 많이 걷기도 했다. 영어는 나의 모국어가 아니고,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와있었는데, 그런데 앤드류와는 영어로 얘기해야 했다. 나는 그와 얘기하기 위해서 그에게 오롯이 집중해야 했다. 혹여라도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테니.
영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그것은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대화를 하기 위해 온통 집중해야 하니, 상대는 '이 사람이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로부터 호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거다. 호감을 느낀다는 면에서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얘기를 앤드류에게 하고 싶었는데 짧은 영어로는 완벽한 문장을 얘기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챗지피티의 영작 도움을 받아 나는 앤드류에게 말했다.
Speaking in a foreign language makes you pay more attention to the other person, which can make you seem more likable.
앤드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너는 내가 얘기하는 동안 계속 내 눈을 보니까' 라고 하면서.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나의 지침과 스트레스를 잊는 것이.
앤드류랑 있는 동안에는 내 집에 있던 일들을,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를 잊었다. 그런 생각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나는 내 에너지를 모두 앤드류의 말을 이해하고 또 내가 하는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썼다. 함께 얘기하고 먹고 마시고 같이 걷고 숙소로 돌아오면, '아 그 스트레스에 대해 내가 생각하지 않았어!' 라는게 그제야 떠올랐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두달간 나를 사로잡고 있던 스트레스 였는데?
그를 만나는 동안만 잊은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웃음이 나고 재미있었다. 하루의 온종일을 붙들려있던 스트레스가 이제 하루중에 어느 때만 떠올랐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잊고 편히 자자고 우황청심환도 먹어보고 신경안정제도 먹어봤는데, 그런데 이게 어떤 한 사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어? 그동안 나를 둘러싼 색이 진회색이나 검정색이었다면, 지금은 여러가지의 총천연색들이 번갈아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인생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도 불쑥 찾아왔다. 즐겁네, 재미있다, 여기 오길 잘했다, 하는 긍정적인 생각들이 쑥쑥 파고 들었다. 그래, 나는 원래 긍정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너무 힘들었지.
나는 앤드류에게도 이 얘기를 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집에 일이 생겨 너무 우울했어. 싱가폴에 오고 나서도 우울했지. 그러다 너를 만났는데 더이상 우울하지 않았어.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You change my mood.
앤드류는 나의 무드를 바꿔주었다. 그것이 앤드류가 의지한 게 아니었을지라도, 앤드류를 만남으로써 가능했다. 그가 여전히 우리의 만남이 놀라웠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너는 내게 선물같다 고도 그에게 말했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우울했던 기분도 잊었고 또 그중 어떤 날은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완벽하기도 했다.
내 집에 초대해 같이 밥을 먹고 창밖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자고 얘기했다. 앤드류가 호주로 돌아가도, 우리가 더이상 여기서 만나지 못해도. 그는 꼭 계속 연락하자고 했다.
사실, 그게 우리의 생각처럼, 말처럼 그렇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 아니던가.
그는 다시 일을 찾아야 하고 또 일상을 나눌 파트너를 찾을 수도 있고, 그곳의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하다보면, 처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차츰차츰 멀어지게 될것이다. 호기롭게 내가 내년 초에 갈게, 얘기했고 그도 물론이지 그 때 좋아, 라고 했지만, 그러나 나는 가지 못할지도, 가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간다해도 그가 시간을 내 나를 만나러 올 수 없는 상황이 될런지도 모른다. 연락은 서서히 줄어들다 언젠가는 더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될 확률도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그가 나의 시절인연이 되어, 어느 한순간에 존재했던 사람이 된다해도, 그러나 그는 굉장히 강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오래 사귀었던 연인보다 내게는 더 만남 자체에 감사한 사람이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그 시간에 선물처럼 찾아왔던 친구라고 나는 그를 내내 기억할 것이다. 시간이 아주 오래지나도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에겐 그런 사람이 있었어' 라고 좋은 기억으로 얘기할 사람. 내가 살면서 '나의 무드를 바꿔준 사람이야' 라는 생각을 처음 했는데, 그만큼 그 느낌은 강렬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었던 '그 밤'이 자기의 옳은 곳(right place) 라고 느꼈다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나는 그 밤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었어' 라고 말했더랬다.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동안의 나를 잊었더랬다. 그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일이 앞으로도 또 가능할거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을만큼,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와 마지막 만남 후 에어지면서 가벼운 포옹을 하고 나는 그에게 굿바이라고 말하고 그는 내게 굿럭 이라고 말했다. 그가 돌아간지도 일주일이 훌쩍 지났네.
아직까지는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고 있다. 그 곳에서 내게, 이곳에서 그에게.
어떤 날은 그립다는 감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여전히 우리의 만남은 놀랍다는 얘기도 한다.
여전히, 아직은,
우리가 서로에게 닿아있다. 아주 가깝진 않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