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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어학연수] High Distinction

by 다락방

레벨3학기를 마치고 2주간의 짧은 방학이 주어졌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 와있다. 다음 레벨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2개월여의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서 설렜는데, 그러니까 뭐랄까, 공부하고 돌아가는 학생 특유의 어떤 뿌듯함? 같은게 있었는데, 막상 돌아와보니, '내가 너무 빨리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 나갔다가 2개월 후 돌아오는 것은 아주 오랜만에 가족을 기쁘게 해줄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가족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그러긴 했는데, 사실 2개월이 큰 감격하기에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닌거다. 막상 한국에 그리고 집에 도착하니 며칠전에 나갔다 온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았고, 흐음, 괜히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더 있다 올걸 그랬어? 2개월은 돌아온다고 설레기에 너무 짧다 싶었던거다.


게다가 한국에 오자마자 몇 시간도 안되어 비염이 나타났다. 하아- 안그래도 한국 오기전부터, 지금 딱 환절기라 한국에 있었으면 비염 앓았을 시기인데, 나 가서 비염 딱 시작되는거 아니야? 했더니, 하아, 첫날 밤부터 재채기에 눈 간지럽고 콧물에 난리가 난거다. 하 쉬바.. 싱가폴 돌아가고 싶다.. 거긴 여름인데, 나에게 비염 따위 주지 않는다굿!


밤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한거라 집에 와서는 낮잠을 잤다. 몇시간 자고 눈을 딱 떴는데, 아, 여긴 한국집이지, 나는 싱가폴에도 돌아갈 집이 있지, 하면서 새삼 이 사실이 너무 좋았다. 와, 너무 좋네. 나 한국에도 집 있고 싱가폴에도 집있어. 물론 싱가폴 집은 4개월 후에 없어질거지만, 그래도 이게 너무 좋아서, 와 이렇게만 살고 싶다, 생각했다. 이렇게 한국에도 집 잇고 싱가폴에도 집 있으면서 뉴욕에도, 로테르담에도, 드레스덴에도 집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진짜. 리 차일드는 뉴욕에도 파리에도 집이 있어서 오고간다는데 ㅋ ㅑ 정말 비싼 대도시 두 곳에 집이라니, 역시 사람은 잘나가는 베스트셀러를 시리즈로 쓰고 볼 일이다. 나도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베스트셀러 만들어가지고 시리즈물 써야겠다. 그런 다음에 싱가폴, 암스테르담, 뉴욕, 드레스덴에 다 집 사놔야지!!


한국행 비행기를 탄 그 날 오전에는 기말시험이 있었다. 시험의 결과는 일주일 후쯤 이메일로 발송된다고 했다. 만약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하고, 그 재시험에도 통과하지 못하면 3레벨을 한 번 더 들어야한다. 나는 내가 통과하는 것 자체는 확신하고 있었지만, 점수가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 며칠전 월요일이었는데, 동네 까페에 가서 글도 쓸겸해서 맥북을 열었다가, 싱가폴 폰으로 왓츠앱(맥북에 깔아두었다)에 메세지가 들어와있는걸 알게 되었다. 뚜안(베트남, 남) 과 로이드(중국, 남)가 보낸 것이었다. 둘다 같은걸 묻고 있었다.


Hey, do you know your score yet?


나는 둘 모두에게 아직 모른다, 이메일로 준다고 하지 않았냐, 받은게 없다, 너는 알고있냐 물었는데 둘다 아직 이라고 답했다. 너무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혹시나 싶어 내게 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서로 혹여 알게 되면 알려주자, 라고 대화를 마쳤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된 후에 학교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라이팅 과제에 대한 평가와 함께 내 기말시험까지 grade 는 HD 라는 거였다. HD 는 당연히 통과이며 가장 높은 등급이다.

나는 내가 가장 높은 등급일 거라는 건 추측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점수가 알고 싶었다. 과연 몇 점으로 가장 높은 등급일지 말이다. 시험 본 날 답 체크하면서 그동안 mock test 보다 점수가 더 잘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점수가 너무 궁금했던 거다. 점수를 알게 된다면 로이드와 뚜안과 얘기하면서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도 알 수 있을터였다. 나름 또 일등이겠지, 생각하고 있었달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무 궁금해서 학교에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내 final grade 는 잘 알겠다, 그런데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에 대한 각 점수가 궁금하다, 그건 어디서 확인가능하냐, 고. 그러자 학교에서 답장이 왔다. 그건 공개하지 않는다는거다. 그게 학교 정책이라고. 아하... 그래서 나는 내 영역별 점수를 알 수가 없다. 게다가 HD 라고 했는데, 그 중에서 몇 번째인지도 알 수가 없다. 할 수 없지. 하여간 가장 높은 등급을 무사히 4레벨로 진급했다. 이제 싱가폴로 돌아가면, 다음주부터는 4레벨의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사설 어학원이 아니라 대학교 부설을 다니고 있다. 그래서 학과 과정이 빡세다. 숙제도 기본에다가 제출할 것도 많고 테스트도 수시로 있다. 그래서 싫으면서 또 그래서 좋기도 하다. 학교에 다닌다는 느낌은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거다. 물론 이곳이 학교이기 때문에 사설어학원과 달리 내 또래의 사람들이 없다. 사설을 다니면 예순에 어학연수 온 사람들도 더러 있곤 하다는데, 이 학교는 학교라서 그런지 나 혼자 뿐이다. 가끔 신문 기사에서 대학에 입학한 만학도들 얘기가 나오곤 하는데, 내가 딱 그런 것 같다. 물론 나는 6개월간 영어만 공부하는거지만, 나는 지금 고등학생들 속에 섞여서 공부하고 있는거다. 좀 더 다양한 나라, 좀 더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함께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공부하는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어른이라서 더 좋기도 하다. 더 자극 받는달까. 이 아이들 틈에서 나는 더 잘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고 들고 말이다.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 사회 친구, 술친구가 된다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학교에 와서 어린 아이들과 동급의 학생이라는 사실도 무척 좋다.


또한, 지금 내가 공부하러 와서 좋다고도 생각한다. 가끔은 이렇게 좋은데 진작 할 걸, 좀 더 어릴 때 했다면 내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도 생각하지만, 그래서 좀 더 일찍 오지 못한게 아쉽지만, 그런데 지금 와서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하는거다. 나는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했고, 그래서 수업 시간에 다른 아이들과 다른 답을 할 수 있다. 내가 다른 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내가 더 똑똑해서 좋다는게 아니라, 나의 다른 답을 아이들이 듣게 된다는 데에 있다. 발명가에 대한 질문에서 내가 퀴리부인을 얘기했을 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작가에 대한 얘기에서 스티븐 킹을 얘기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교과서에 몰타섬 얘기가 나왔을 때에는 그곳에 가 본 사람이 나였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선생님과 하면서 아이들이 다 들으면, 그건 그것대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으로 쌓이지 않을까?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단어들을 내가 말할 때마다, 그래서 선생님이 칠판에 써가면서 좋은 단어였다고 얘기해줄때마다, 이 모든 것들을 한 번 듣고 기억하는건 아니어도, 언젠가 이 학생들에게 떠오르는 무엇이 되어있지 않을까?


게다가 수업 시간도 좋다. 과제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도 당연히 있지만, 새로운 단어들이 좋고, 새로운 단어가 나왔을 때 선생님이 그 단어의 뜻을 영어로 설명해주는 것도 너무나 짜릿하다. 마치 영영사전 찾아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것들을 알게 될 때마다 이해가 쏙쏙 되면서 너무나 재미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나오는 단어는 따로 외우지 않아도 기억을 하게 되는 편이다. 아, 내가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에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다녔다면 전교1등 할 수도 있었을텐데.. 아니 아이큐로 보건데 1등은 무리데쓰?


스피킹 테스트는 단순히 말하기를 하는게 아니라, 주제를 주고 거기에 어떤 것들이 담겨있어야 하는지를 가이드해준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말한다면 스토리는 기본이요, 거기에서 특별히 내가 무엇을 좋게 느꼈는지가 포함되어야 하고, 주말 루틴에 대해 말한다면, 그 루틴에 또 뭐가 추가되길 원하는지도 말해야 한다. 쓰기에서는 다양한 접속사를 써야 하고 '나는', 이나 '우리는' 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야 하는 규칙이 있다. 이런걸 배워나가면서 차츰 적용하는 것은, 그래서 처음보다 나은 말하기와 쓰기가 되어간다는 것은 정말로 짜릿하다.



이건 내 쓰기 두번째 과제에 대한 평가다.

챗지피티에게 번역해달라고 하면 이렇게 표현된다.


내 글에만 이런 평가가 있는건 아니고 글쓰기 통과한 학생들 모두 이 평가를 받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격에 대한 평가들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구성 면에서도 그리고 언어 면에서도 나는 이 평가에 만족한다. 특히 라이팅 부분에서 나는 이 학교에 와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몹시도 만족스럽다. 내 글쓰기가 점점 더 나아질거라는 생각이 드는거다. 실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직 리스닝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서 리스닝을 좀 더 훈련해야 하는데, 갈 길이 멀다. 이번주에 싱가폴 돌아가면 유튜브로 계속해서 영어 관련 영상을 틀어둬야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2개월후에는 또 이렇게 짧은 방학이 있다.

그 때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생각이다. 2개월 후 돌아오는 건 너무 짧았다. 나는 내가 한국에 들어오면 '김미소'가 언급한 그 '코드 믹싱'을 할 줄 알았다.


"오늘 원래 3시에 보기로 했는데 못 봐서 잔넨(유감) ㅠㅠ" 해외에서 한국인과 대화하거나, 해외에 오래 산 한국인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언어 간의 경계를 몇 번 뛰어넘었는지 의식조차 못 하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코드를 섞어 말하는 걸 ‘코드믹싱(code-mixing)‘이라고 부른다. - [언어가 삶이 될 때], 김미소, P82


그런데 2개월은 정말 너무 짧아가지고, 한국말만 겁나 잘하고 있네.

조카들 만나러 갔는데 첫째 조카가 '이모 영어 왜 하나도 안써? 만나서 지금까지 영어를 하나도 안하는데? 영어해봐!" 하는게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친구 만났는데도 '뭐야, 한국말 잘 못할 줄 알았는데 한국말 너무 잘하는거 아니야?" 하는거다. 하아- 코드믹싱 하기에는 2개월이 너무 짧았어!


게다가 낯선 언어가 가득한 공간이 그리워진다.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들이 너무나 그리워. 그곳의 햇살도 그립다. 그곳의 더위도 그립다. 이제 2개월 후 방학에 안오고 4개월 후에 올 생각인데, 그 때 내 영어 실력은 얼마나 늘어있을까? 과연 늘긴 했을까? 그때는 과연 코드믹싱이 가능할까? 그리고 4레벨 기말에서도 나는 가장 높은 등급을 받고 마칠 수 있을까?


얼른 싱가폴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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