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우리들의 겨울나기
새로운 해가 찾아옴과 동시에 우린 겨울의 중턱에 놓였어요. 문득 작년을 돌아보며 든 생각인데요. 네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이렇게 출근하고 퇴근하기만 반복하다 끝나는 것은 아닌지,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하나, 떠올리면 아득해지곤 해요. 다른 사람들은 이 겨울을 어찌 지나고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공간, 라이프스타일 브랜딩 디렉터, 에디터, 미디어 플래너까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나요? 쓰린 겨울을 포근히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릴게요. 타인의 추억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의 그날이 떠오를 거예요.
Editor 지수
Photo 김수진, 오성언, 최민석, 김민정
김수진
어쩌다 책방·어쩌다 산책 디렉터
어쩌다 책방·어쩌다 산책의 디렉터로 다양한 맥락에 책을 놓는 일을 하는 수진. 책방에 입고할 책을 선정하는 일부터, 전시 기획 및 원고 작성, 공간 운영 및 신규 출점 등 책방의 내용과 형식에 관련된 일을 한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미 충분히 피곤한, 일상에 책을 들일 자리가 없는 분들을 위해서요. 저는 그런 분들을 위해 삶에 자리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전하는 다정한 안내자로서 일하고 싶습니다."
Q. 지난 겨울에 안식월을 보내셨다고요. 일하는 사람에게 안식월이란 무척 소중한 시기죠.
2년 전이었는데요. 6년 동안 쉼 없이 일했던 저에게는 전례 없는 휴식의 시간이었어요. 목적이나 계획없이 지내본 적이 없었는데 그 한 달만큼은 눈 내린 겨울 풍경처럼 지냈어요.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간단한 식사를 차리고, 동네를 걷고, 청소를 하거나 몸을 돌보고, 다시 잠에 들고. 그런 조용한 시절에 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친구들을 만났어요. 산책길에 있는 작은 강이 꽁꽁 얼어있는 추운 날이었는데 한 친구가 그 빙판 위를 걷자고 제안했어요.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친구 두 명,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그 강을 한참 걸었어요. 저는 그날 알게 된 것 같아요. 오랜시간 어딘가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가둬두었다는 걸요. 힘든 시기를 겨울에 비유하곤 하는데 저는 그 시절에 겨울을 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요.
Q. 수진이 겨울을 나는 방법은 어땠을까요?
그 겨울의 목표는 “스스로를 구한다”였어요.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게 중요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건 음식이었어요. 10년 넘게 자취를 했고 바깥 음식에 익숙해져 있었던터라 한달동안 건강한 끼니를 챙기는 게 쉽지 않았어요. 방도는 채소 스프였어요. 토마토, 양배추, 양파, 당근, 샐러리, 소세지나 고기를 넣고 푹 끓이다가 치킨스톡이나 토마토 페이스트로 간을 맞춰서 만들었어요. 아는 채소를 넣고 끓이기만하면 되는데 공들인 음식만큼이나 맛있었죠. 직접 채소를 다듬어 음식을 만들고 나면 스스로를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이 잦아들었어요. 지금도 날이 추워지거나 괜히 마음이 헛헛해지는 날엔 채소스프를 끓입니다.
Q. 지금은 새해를 기약할 시기인데, 곧 새로운 책방을 오픈할 계획이라고요.
겨울날 언 강을 걷자고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겨울은 내내 슬프기만 했을 거예요. 새해에는 마음의 겨울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다정한 산책자가 되어주고 싶어요. 곧 새로운 책방을 오픈할 예정인데, 그동안 곁에서 지지해주시고 도와주셨던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고요. 모두가 큰 상실을 겪은 한해였던만큼 새해에는 주변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 최우선일 것 같아요.
수진's Book
언 강을 걷고 난 이후에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모두가 첫번째 삶에서 수련 중이라고 생각해요. 시련을 잘 넘기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면 시련이 수련처럼 느껴져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 이 책의 구절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지만,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워야 떠날 것입니다.”
오성언
팀포지티브제로TPZ 커뮤니티·브랜드 디렉터
사람과 공간을 연결 짓는 일을 한다. 오프라인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만들고 있는 팀포지티브제로(TPZ)에서 커뮤니티 문화를 만들며, 공간을 운영한다. 지속가능한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많은 사람이 브랜드와 친밀한 교감을 느낄 때 일의 기쁨을 느끼며, 오너들의 자연스러운 태도와 건강한 관점을 확실히 가진 브랜드의 숍을 방문하길 좋아한다. "취향과 안목은 평가의 영역이 아닌,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기준이자 시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살고 있는 집과 나라는 사람을 가꾸며 살아가려 노력해요."
Q. 성언에게 겨울은 어떤 계절인가요?
소중한 지인들을 집에 초대해 안부를 묻고, 몸과 마음을 정리하며 새로운 계획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계절이라고 생각해요. 집을 공개한다는 게 취향을 함께 공유하는 의미와 같잖아요. 좋아하는 카페 원두로 커피를 내리고, 음식을 준비하고, 매월 꾸준히 수집한 사진집을 함께 보며 자연스러운 일상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로 남아요. 늘 그래왔듯이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어떠한 환경의 변화를 불어오지는 않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어요. 돌아보니 저에게 겨울은 늘 긍정적인 일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로 가득 찼던 것 같네요.
Q. 새해엔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뀐다고 하셨는데, 어떤 목표가 있는지 궁금해요.
새해에 중요한 가치관으로 둔 단어가 있는데요. ‘Hospitality’. 저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따뜻한 환대를 경험 했으면 좋겠어요. 울산에서 오랫동안 미용실을 운영하고 계신 저의 어머니는 카카오톡 프로필 대화명에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천국같은 삶’. 저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2023년은 30대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20대에는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경험에 익숙한 시간을 보냈다면, 30대는 주변에 집중하며 편하게 생각하는 소수의 친구들과 그럭저럭 평안한 관계를 오랫동안 이어가고 싶어요. 그저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행복을 정의한다면 이런 난로 같은 관계이지 않을까요?
성언's Music
20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돌아보니 저의 키워드는 언제나 ‘불안’이었어요. 저와 같은 마음으로 흔들리고 있을 많은 20대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음악이에요.
김민정
포인트오브뷰 콘텐츠 에디터
매일 키보드를 두드리며 브랜드의 언어를 고민하고, 브랜드의 문체를 다듬는다. 크게 보면 편지를 쓰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민정은 생각한다. "특정한 누군가에게 쓰는 것은 아니지만, 빈 종이 앞에서 오래 고민하고, 진심을 담은 문장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이를 어떻게든 부치는 일이니까요." 즉흥적이라 큰 틀 아래서 움직이지만 일할 때는 꼼꼼히 계획을 세운다. 몸담는 방은 덜 치우더라도 업무 파일들은 각을 맞춰 정리하는 사람.
Q. 여름과 겨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요?
여름의 낭만이 있고 겨울의 낭만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겨울의 낭만이 더 많은 사람 쪽에 가까워요. 계속 떠오르는 기억은 20년도 겨울이네요. 제 생일이 겨울이거든요. 점온전히 저를 위해 하루를 쓰고 담백한 선물을 해보자고 계획을 세웠죠. 심즈음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책 한 권을 골랐어요. 그 책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였어요. 집에 돌아와 첫 페이지를 열어 ‘20년 겨울, 민정에게 민정’이라고 적었어요. 마침 표지 그림 작품이 샤갈의 <생일>이더라고요. 사강이 이 책을 24세에 썼다고 해요. 저도 24살 생일을 맞이하던 중이었거든요. 괜히 이런 우연에 의미 부여를 하고, 그러다 보면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되잖아요. 이후로 사강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어요. 절판된 그녀의 책을 중고 서점 곳곳을 헤매며 구해서 읽을 정도로요. 사강, 사강 반복해서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다 보면 ‘사랑’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그런 책과 글을 썼던 그녀에게 살짝 질투가 나기도 하고요(웃음). 그녀는 미묘한 단어로 섬세한 묘사를 거쳐 정확한 감정을 촉발하는 문장을 만들어요. 사강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건 끝이 없네요.
Q. 올해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조금 더 가벼워지고 싶어요. 부담이나 욕심이나 집착같이 자신을 누르는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다고 해야 하나.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한층 더 가볍게 지금을 충실히 지내는 것이 제가 바라는 한 해의 모양이에요. 그러면 어디든 가볍게 짐을 싸서 여행도 다닐 수 있을 것 같고, 뭔가 도전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덜 하지 않을까 싶네요.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더 자주 많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점점 더 그런 시간이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새로 산 다이어리에 가득 채우고 싶어요.
민정's Book
일을 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때 이 책을 열어본다면 좋을 것 같아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인 것 같지만,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관점을 던지거든요.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즈음 이 책의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인 이유를 알게 되실 거예요.
최민석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 미디어플래너
광고 매체와 상품 구성, 타겟팅 제안,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유튜브, 카카오톡 속 광고는 대부분 미디어 플래너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 시작했던 광고. 퍼포먼스 마케터로 시작해 미디어플래너까지. 훗날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민석은 어떤 것을 보든 장점에 집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다. 소설 보다 시를 좋아하고, 드라마 보다는 영화를 좋아한다. 밀도가 높은 것에 더 끌리는 사람.
Q. 민석의 지난 겨울은 어땠나요?
캐라반 숙박을 위해 오전 일찍 떠났어요. 5년 전 12월 1일, 조금 건조했고 아직 맹추위가 오기 전이라 볕이 좋은 날이었어요. 그날 캐라반 숙소에는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어요. 한적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고요한 강을 발견했어요. 잠잠한 검은 강물에 반해서 한참을 앉아있었어요. 친구는 그날의 소리를 녹음기로 담았어요. 나중에 받게 된 녹음본은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왔어요. 낙엽, 호수의 파도, 오후의 대화, 밤의 대화라고 지어진 녹음 파일의 제목들이 시목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몇 달 전 먹은 비싼 저녁 식사는 사진첩을 보아야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지만, 작은 우연이 겹쳐 소소하게 얻은 행복의 기억은 5년이 지나고서도 뚜렷해요. 시에서 운율이 만들어지듯 삶에도 생율이 있다고 생각하면 반복되는 인생이 조금 더 재밌고 의미 있어지는 것 같아요. 올해 한해도 이런 생각으로 살았고,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한 달 남짓 남은 올해도, 그리고 내년도 생율을 느끼며 살고 싶어요.
Q. 올해도 자주 들고다니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여행갈 때마다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다녔어요. 휴대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손에 카메라를 쥐고 있으면 풍경과 날씨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어요.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아름다운 장면들을 마주하게 돼요. 왕복 3시간이 넘는 통학에 지쳤던 대학시절, 통학 시간을 작은 여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다녔거든요. 여행자의 시선으로 하는 통학 시간은 정말 짧게 느껴졌어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다면 카메라를 손에 쥐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보세요.
Q. 올해 목표가 있다면요?
어떤 날을 보냈든 어떤 날이 기다리고 있든 잘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늘 저에게 알맞은 침구를 고민하고, 명상을 하고, ASMR을 듣기도 해요. 새해에도 잘 자서 힘든 날로부터 쉽게 벗어나고, 힘들 날도 잘 해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를 기원해요. 매해 거창한 계획이나 가치를 세우고 지키려는 노력은 안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가끔 그런 것들이 당장 눈 앞에 있는 작은 행복들을 뒤덮기도 하니까요.
민석's Application
수면 분석 앱을 사용하고 있어요. 몸 관리를 할 때, 인바디를 활용하는 것과 같은 거죠. 모호한 영역을 숫자로 확실히 인지했을 때 좀더 관리가 편해요. 내가 어떤 조건에서 잠을 자는 지, 어제는 얼마나 잘 잤는지 왜 깼는지를 확인할 수 있죠. 평소에 마주하지 못한 스스로를 더 알게되어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